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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Jan 27. 2024

삼성도 먹고살아야지요, 할머니들!

나의 병실 룸메 할머니들

암병동 입원실에 있다가 지금은 외과 병동 입원실로 왔다.


(라우 클랑크닉 Frau Klancnik)


올해 77세 크로아티아 출신 할머니시다. 어딜 가나 반장 하실 스타일. 호기심이 많으시고 잠시도 못 앉아계시고 못 누워계시는 전형적인 활동가형. 거기다 완벽 성향과 오지라퍼 성향도 다분하심. 염색한 금발의 머리는 항암과 방사선으로 반 밖에 안 남았다고 계속 푸념하심. 2023년도 난소암 발병 후 몸무게가 12킬로 빠지심. 눈빛이 매서우셔서 푸근한 인상은 아님. 자기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전히 분개하심.


처음 내가 침대에 실려 등장하자 계속 궁금해하시며 방사선 광선빛을 능가하는 눈초리가 오른쪽 침대에서 넘어옴. 그러다 화장실 가려고 일어서는데 (통증 때문에 빨리 못 일어나고 느린 동작으로 일어남) 매의 눈으로 나를 계속 빤히 바라보심. 두어 번 눈을 마주며 웃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내가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저를 계속 보고 계시네요? 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5일 동안 내가 너무 심심해가지고. 아이고, 곡 소리 나올 뻔. 왜 그리 심심하셨냐니까 삼성폰이 고장이 났단다. 배터리가 터졌다나. 아니, 그런 일이? 믿기지 않아 하자 그러니까 말이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 하며 또 흥분하신다. 미심쩍어서 확인 들어감. 그런데 폰을 몇 년이나 쓰셨는데요? 8년! 아이고오오 할머니, 그러시면 삼성 망해요. 제 폰 보세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2년마다 폰을 바꾼답니다. 8년이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요.


(여기서 잠시 왼쪽 할머니 목소리만으로 등장. 나도 삼성인데? 그럼 할머니는 폰 쓰신 지 얼마나 되셨는데요? 12년. 졌다! 할머니들, 제발 그러지들 마세요. 삼성도 먹고살아야지요..)


프라우 클랑크닉은 크로아티아 출신 셰프인 남편과 아들 며느리와 뮌헨에서 30년 넘게 비어가든을 운영 중이시다. 코로나 때도 오랜 단골들이 매일 음식을 테이크 아웃해 가 주어서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기셨다고. 그래서 놀랍게도 지금까지 음식 값을 올리지 않았다고. 들어보니 정말 저렴했다. 코로나 이전도 그랬지만 특히 이후에 메인 요리가 10유로를 넘지 않는 곳을 찾기란 드물기 때문에. 이 할머니의 지론은 이랬다. 음식이 맛있고 가격 저렴하고 거기다 친절하기까지 하면 손님들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다고. (사실 맞잖나? 왼쪽 할머니와 우리도 한 번 가서 먹어보기로 했다.)

 

30년 밥 장사 하시며 고객을 보다 보면 나름 사람을 보는 안목이 생기기 마련. 리 남편과 아이가 다녀간  할머니의 평가는 이랬다. 남편 참 좋은 사람이구만, 하트가 있네. 한국의  친정 엄마도 처음 우리 남편 보실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말씀을 하셔요. 아이는 차분하고 총명하겠고. 감사합니다. (나에 대해서는 대놓고 평가하지 않으시는 매너도 지 않으셨다. 좋은 남편과 좋은 아이가 있으니 빨리 쾌유하라는 덕담으로도 들렸다.) 수술 후 다녀가신 우리 의사 샘에 대해서 한 마디 잊지 않으심. 오픈 마인드 의사로구만. 나는 지금까지 저런 의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우리 의사 샘 의문의 1승!) 수술까지 잘 하신답니다. 내가 덧붙였다. 른쪽 완벽형 할머니는 내가 수술하는 날 아침에 사모님 스타일로  변모하셔서 손을 흔들며 귀가하셨다. 다음에 먹으러 갈게요, 왼쪽 할머니와 내가 마주 손을 흔들며 말했다.




(라우 로트마이어 Frau Rothmeier)


낙천인 스타일. 병원에서 찡그린 내색이나 싫은 소리 하시는 걸 한 번을 못 들음. 늘 TV 소리 키워 시청하심. 나는 그것을 백색 소음이라 생각하 . (어느 날 깐깐한 간호사가 와서 다른 룸메 분들 생각도 해주셔야죠, 하며 헤드폰의 행방을 추궁하자 아무 말 없이 이불속에서 쓰윽 꺼내놓으실 때 내가 본 유일한 언짢음을 나타내정이었.) 폰도 즐겨 보셨음. 즐기는 취향이 확실하셔서 룸메로 지내기 좋음. 서로 간섭할 일도 없고. 나이는 70대 중반 추측. 할머니의 독일어가 얼마나 알아듣기 힘들었는내게는 외국어 같았음. (어 쪽 방언인지 모름..) 표정이 온화하고 병원에서 몇 날 며칠 소변줄까지 꽂고 꼼짝없이 누워계시는데도 전혀 불편해 하시지 않고 휴가 오신 듯 호캉스를 즐기는 듯 보이. 이런 분이 왜 암이지?


첫날 머리를 보시고는 사진 찍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왜요? 하고 여쭈니 멋있어 보여서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고 하심. 이게 무슨 스타일이고 그런 게 없고요, 그냥 집에서 남편이 밀어준 건데요. 암튼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으시단다. 폰을 셀카 모드로 돌려놓고 나한테 넘기심. 앞쪽, 옆쪽을 다 열심히 찍어서 돌려드렸다. 그런데 폰을 받으신 할머니가 셀카 모드에서 일반 사진 모드로 못 돌아가고 헤매고 계시는 게 아닌가. 나도 한참 찾았네. 12년 전 삼성폰은 셀카 모드로 바꾸는 사진기 모형이 신기하게도 폰 왼쪽 상단에 있더라고. 지금처럼 아래쪽이 아니라.


(토요일 밤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할머니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화요일 아침에 비어가든 운영하시는 오른쪽 할머니 퇴원시고. 나는 화요일 점심때 수술받으러 가서 저녁 돌아왔다. 그 길로 침대에 붙박이로 48시간을 지내야 했데, 그 사이 목이 뻣뻣하고 아프고 옆으로 안 돌아가는 불상사도 있어서 룸메를 돌아보지도 못하 말로만 소통하다가 마침내 목요일이 되었다. 그동안 있던 곳은 암센터 입원 병동이었는데, 그날은 내가 외과 병동으로 옮겨가는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 실려가며 낙천적인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할머니의 민머리를 보았!)


프라우 로트마이어, 그새 머리를 깎으셨네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내가 묻자 이분이 이러신다. 내가 프라우 오 스타일 에 들어 깎는다고 했잖아요. 아니, 그런데 대체 머리는 언제 깎으신 거지? 내가 2박 3일을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을 때 나이 많은 남자 간호조무사가 할머니 침대를 빙 둘러 병풍을 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분께 부탁해서 깎으셨나? 가위, 머리, 이런 단어가 들린 것도 같고. 아무튼 머니 스탈은 어땠냐고? 누가 보면 할머니가 내 은사 비구니 스님인 줄 알겠다고 하면 대답이 되려나? 입원 초반에 할머니 아들도 한 번 다녀갔는데 그렇게 인상이 선하더라고. 그날 할머니의 아들이 얼마나 공들여 침대 옆 붙박이 소형 TV를 손보고 가던지, 집 아들인지 진짜 효자네, 감탄사를 부를 정도였다.


한 번은 런 일도 있었다. 내가 병문안 온 남편에게 수술하고 돌아온 날 밤 한숨도 못 잤다고 앓는 소리를 하니까 왼쪽에서 조용히 TV를 보시는 줄 알았던 할머니가 이러심. 밤사이 내 코 고는 소리를 분명히 들으셨고. 그리고 잔 사람은 자기라고.  재빠른 변명했다. 아마 새벽에 지쳐 잠깐 잔 거 같요. 그런데 말이다, 내가 이른 아침 할머니 코 고는 소리를 분명히 은 것 같은데 그건 그럼 뭐지? 내 침대가 병실을 빠져나오기 전에 나의 낙천  할머니가 큰소리로 외치셨다. 프라우 오, 걷게 되면 나 병문안도 와줘요! 그럼요, 프라우 로트마이어, 꼭 올게요!




석 달 100일 만에 세 번이나 등 수술을 감행한 감회 이렇다. 못 할 짓이었다. 그런데 사람 몸이 그걸 또 버텨내네, 놀랍고 신기했다. 의사가 세 번째 수술을 제안했을 때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다. 산후조리 잘 못한 산모가 둘째나 셋째를 출산하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면 몸이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그 사례에 빗대어 나도 이번에야말로 수술 후 제대로 휴양을 해보자, 뭐 런 생각 말이다. 그래봐야 기다리는 건 빨리 회복해서 항암을 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항암을 매주 하다가 2주에 한 번 하니 여유가 있었다. 수술이니 뭐니 이런 난리 없이 항암만 할 수 있도 행복이라 말할 수 있겠. 가족들과 내 손으로 건강한 항암 요리 해 먹는 것도 퇴원 이후 내 버킷 리스트 1호다. 수술을 세 번이나 하다보니 행복의 기준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번에 보니 '기도빨'이란  실제로 있더라. 내 수술 예정 시간이 한국의 오후 4시 이후였는데 그 시간에 맞춰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셨다. 한국에서도 독일에서도 브런치에서도. 그 기도가 먼저 당도해서 내 수술실을 미리 꽉 채워놓았던 게 아닐까. 그 정성이 내 마음 속으로 세 분의 부처님과 보살님과 스님을 모셔온 게 아닐까. 어디 부처님들 뿐이었을까. 하느(나)님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까지 두루 다 모셔왔던 게 아닐까. 그러니 결코 나 혼자의 힘이 아니었던 거다. 돌아보면 두 번째 수술 때는 울며 수술실에 들어갔고, 눈물을 닦으며 수술대에 누웠으니까.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아직 완전히 일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수술 후가 궁금하실 것 같아 누워서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폰을 든 팔이 좀 아픈 것 빼고는 괜찮다. 외과 병동으로 오기 전 목 아프던 것도 많이 풀렸다. 외과로 온 날  48시간 누워있기가 끝나서 물리 치료사가 오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연습을 시켰다. 꼬박 6일을 누워있게 방치만 하고 신경도 안 쓰던 두 번째 수술 때가 생각났다. 지금 집도의는 그런 분이 아니라 다행이다. 다음날인 금요일엔 다시 물리 치료사와 일어나 앉는 연습, 화장실 대용 의자에 앉는 연습을 고, 간호사와는 화장실까지 다녀오는 연습을 마쳤다.

 

진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혹시 몰라서 매 끼 식사 때마다 진통제를 알약으로 먹고 있고, 링거로 항생제를 맞고 있다. 외과로 옮겨온 지난밤처럼 갑자기 수술 전에 있던 허리와 다리 쪽 통증이 찾아와서 밤새 진통제를 추가로 맞기도 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같은 통증이 또 오지는 않았는데, 밤사이 다시 통증이 있을지 긴장 모드로 지켜고 있다. 수술한 지 나흘째, 침대에 누운 채로 조금씩 밥도 먹고, 혼자 일어나 화장실도 가고, 볼 일도 보고 있다. 통증이 왜 왔는지, 또 올 건지 그건 나도 모른다. 다만 남편이 매일 들고 오는 밥과 도시락, 때론 계란 프라이가 얹히고 때론 칸을 넘어온 김칫국물이 적셔진, 가 병원 오던 날 다시 한번 보여준 대로 밥솥에 밥 하는 법을 배운 우리 딸이 지은 밥을 담은 따뜻한 도시락. 함께 일했던 한인마트의 J언니가 보내주신 콩나물, 비빔밥에 들어가는  가지 나물, 먹기 좋도록 껍질을 깍은 하얀  나란히  세 개의 크고 둥근 배달용 도시락 모서리쁜 시간에 급히 휘갈겨  듯 쪽배처럼 매달려 힘 내라 소리치는 언니의 마음을 등대 삼아 보고 으로 나아갈 뿐.



병원 음식(위). 먹다 보면 1/3도 못 먹고 지친다. 남편의 도시락과 뮌헨 한인마트 J언니가 우리 남편을 통해 보낸 정성과 사랑 가득한 반찬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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