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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Feb 02. 2024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진통제만 믿고 퇴원하기로 합니다

아침에 병원에서 먹던 따듯한 한국 녹차에 밥 한 숟갈.


티베트에 그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다'. 지금 내가 그렇다. 그래서 걱정을 적게 하기로 했다. 수술한 지 열흘. 급실에 입원한 날까지 합치면 2주째. 이제 퇴원을 생각할 때다.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도 병실이 턱 없이 모자라 나처럼 2주나 입원을 허락하는 경우가 많진 않다. 그사이 병원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코미디처럼 믿 어려운 사건 사고들과 함께. 어찌 보면 우리 사는 게 코미디의 연속일지도.


피주머니에서 피가 한 방울도 안 나온 것도 그중 하나다. 화요일 수술을 했는데 토요일까지. 그럴 수도 있나? 병실에 들어오는 의사마다 붙잡고 물어도 집도의를 포함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대답해 주는 람은 없었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토요일 등 수술 부위에 드레싱을 갈아주던 당직 의사가 피주머니에 연결된 관이 너무 꽉 끼어서 피가 못 나오는 것 같다며 호스를 조정해 줄 때까지. 그제야 피가 나왔다. 그게 나와야 내 통증이 줄어들. 그 순간 내가 있던 바로 천국이 되었다.


일요일인 다음날. 기쁨도 잠시.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려고 는데 바닥으로 호스 하나가 떨어졌다. 피주머니에 연결되어 있던 호스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상황 종료라니. 피주머니에는 250ml의 피가 모인 후였다. 아니, 이럴 수가? 다른 방법은? 일단 없단다. 월요일 집도의와 의논을 하기로 했다. 밤새 통증으로 잠을 못 자고 만난 도의도 다른 대안이 없고 했다. 피주머니는 술 때만 달 수 있고 다시 피주머니를 달기 위해서는 개복해야 하는데 그건 감염의 우려가 너무 커서 절대로 안 된다고. 그럼 저는 어쩌라고요.. 울고 싶었다. 계속 울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집도의 말대로 안에서 피가 멎기를 바랄 수밖에. 어딘가에서 피가 나오는 것도 회복 과정의 일환인데 4주-6주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고. 그럼 통증은? 그때까지 진통제로 버텨보자고 했다. 게 가능할까. 자신이 없었다. 지난주는 계속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수술 잘 끝나고 이게 무슨 난리인가. 피주머니 문제가  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물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 포함해서. 런데 그게 내 경우가 되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왜 이런 일이? 억울한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진통제를 아침, 점심, 저녁, 밤에 규칙적으로 먹는데 그날밤 당직 간호사가 가지고 온 약이 개수도 많고 색깔이나 모양도 처음 보는 거였다. 궁금해서 물었다. 원래 먹던 거랑 달라 보이는데 어떤 약인지 말해줄 수 있냐고. 그랬더니 간호사가 다시 와서 한다는 말이 물어주길 잘했다며 다른 사람 약하고 바뀌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바꿔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거라고. 그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무서워서. 내가 스스로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싶었다. 끝까지 미안하단 말도 없었다. 이게 가장 적응하기 힘든 독일 문화다. 사과를 않는다는 것. 자신이 잘못는데도. 물론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 안 좋을 땐 이런 일도 겹치더라는 거지.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물고 오고, 안 좋은 일은 안 좋은 일만 몰고 오는 것 같다.



내가 과일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어느 햇살 같은 분이 마트의 향내 나는 과일 매대를 통째로 병원으로 옮겨오셨다.


이번 주로 넘어오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절망에 빠져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빨리 떨쳐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밥은 매일 남편이 챙겨 오고 밑반찬은 주변에서 보내주다. 별 수 없다. 밥심으로라도 이겨내고 버텨내는 수밖에. 시 내 자리로 돌아오기. 밝은 긍정과 빛나는 삶의 에너지로. 그렇다, 원래의 나로. 화요일 새벽이었다. 통증으로 잠을 못 잔 지 이틀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것도, 둠의 커튼과 장막을 떨쳐버리는 것도 내게 달린 일이었다. 스위치는 내 손안에 있으니까.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얼굴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마음 통하는 친구들을 병원으로 불러 불안했던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했다. 말로 셀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나를 걱정하던 분들의 병문안과 전화 통화도 기꺼이 받았다. 그렇게 사흘 동안 만나고 먹고 얘기하며 부활하자 내 표정이 어땠겠나. 몸에서도 얼굴에서도 빛이 나지 않았겠나. 의사와 간호사들의 놀란 반응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 고뇌의 시간들. 불면과 통증의 시간들. 이게 맞나, 다른 병원과 의사를 찾아가서 다시 검사와 진단을 받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러다 진통을 못 이겨내기라도 한다면. 아이는 이제 열네 살이 되는데.. 이 모든 번민들을 봄날 같은 햇살 속으로 던져버렸다. 후련했다. 가벼웠다. 날아갈 것 같았다


목요일까지 외과 입원실에 있다가 계속 퇴원을 종용하길래 뻗대다가 어제 암병동 입원실로 돌아왔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첫날부터 암병동 병실에 머물면서 수술을 받고 외과 쪽으로 넘어갔던 터라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그때의 내 상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를 맞아주듯 얼마나 따듯하게 맞아주는지 가슴이 촉촉했다. 그런데 내가 멀쩡해도 너무 멀쩡해 보였나 보다. 어쩌겠나, 생기라는 건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니. 암병동 쪽도 입원실이 턱 없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금요일쯤 퇴원할 수 있겠는지 담당 의사가 물었다. 사실은 주말까지 있다가 다음 주부터 항암을 시작하면 좋겠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병원 사정을 잘 알면서 무턱대고 고집을 부리기도 어려웠다.


병원에서도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진통제를 시간 맞춰 먹는 것 말고 실제로 다른 일은 없었다. 의사 말로는 병원에서 먹는 강한 진통제 처방을 받아서 집에서 그대로 복용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것,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라도 병원으로 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병원에서 내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병원 있으면서 너무 오 밤잠을 못 자서 수면제 약 졸피뎀도 처방받았다. 병원에서의 마지막인 지난  밤은 통증도 없는 숙면의 밤을 보냈다. 저녁 8시에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먹었고, 9시에 다른 진통제 두 알을 먹고 잤다. 밤 12시에 잠이 깨길래 수면제를 먹고 새벽 4시까지 통잠을 잤다. 통증을 느끼지도 않고. 유레카!


집에 돌아가도 매일이 이럴 거라고 낙관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실의에 차 있을 때처럼 절망에 빠져있지도 않을 테다. 매 순간 통증은 새로움으로 나를 찾아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테고, 그때마다 나 역시 생기로 화답해 줄테다. 나 역시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가라면 가야지. 억지로 떠밀려서 눈물 바람하며 떠날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밝고 힘찬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그것이 순리에 맞다. 사람도 순리에 따를 때가 가장 편하다. 나는 그런 편이다. 어떤 거부감도 스트레스도 없으니 것이  투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곧 입춘. 새해도 왔고 머지않아 봄도 올 테니 새 날은 벌써 내 앞에 펼쳐 있었다. 진통제와 함께 다시 시작하는 투병. 시작도 있고 중간도 있으니 끝도 겠지.



병원에서 먹었던 고마운 분들의 집밥과 반찬들. 사진에 올리지 못한 예쁘고 맛있던 계란말이는 내 마음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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