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뮌헨의 마리 Feb 11. 2024

현재를 즐기세요 누구도 내일 일을 몰라요

완화병동에서 1주일

 남편이 챙겨온 간식과 밥. 나를 위해 누군가 챙겨준 소중한 선물, 생강청(위). 병원에서 먹는 아침과 점심과 저녁(아래).


완화병동에 온 지도 1주일 다. 심한 통증이 있은 후 월요일에 와서 그새 주말이 되었으니. 오기 전부터 소변줄을 달았고 일어나지도 못했기에 완화병동에 와서 내게 주어진 일은 단순했다. 일어나 앉기, 일어나서 걷기. 소변줄 떼고 화장실 가기.  단순한 일을 해내기 위한 과정 단순하지만은 않았. 


첫 이틀은 물리 치료사가 오지 않았다. 착한 간호사가 이틀 동안 아침마다 몸을 닦아주었다. 수/목에 물리 치료사가 왔다. 수요일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고, 양팔을 높이 올리는 보조기에 몸을 의지해 복도를 두 바퀴나 돌았다. 목요일은 손잡이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단순한 보기를 양손에 잡고 복도 두 바퀴를 걸었다. 이틀 동안 걸을 때마다 소변줄과 함께 모르핀을 맞고 있는 링거형 수액 지지대를 같이 밀고 다녀야 해서 번거롭긴 했지만 걸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후에도 간호사와 복도 두 바퀴를 걸었다.


드디어 금요일. 물리 치료사도 오지 않는 날이라 오전에 간호사와 함께 복도 두 바퀴를 걸었다. 소변줄을 떼도 되는지 물으니 떼도 괜찮고 떼 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연결하는 것도 언제든지 된다고 했다. 한 번 떼 보고 싶었다. 무 오래 소변줄을 달고 있으면 방광에 좋을 리가 없었다. 엉덩이 쪽 마비 증세는 여전하지만 시간 맞춰 변기에 앉으면 내 방광이 스스로 제 역할을 해 줄거라 믿었고, 그런 내 생각은 맞았다.


후에 남편과 아이가 왔을 때는 아이와 함께 소변줄 없이 복도를 세 바퀴 걸었다. 리고 저녁에는 링거형 수액 지지대도 뗐다. 통증이 또 올까 봐 무서웠지만 언제까지 수액으로 진통제를 맞을 수도 없었다. 혼자 집에서 먹을 수 있게 알약으로 먹는 연습을 해야 했다. 그래야 퇴원과 함께 항암도 가능할 테니까. 행히 수액 없이 이틀 동안 알약으로 잘 견디는 중이다. 잠을 푹 자지는 못하고 밤에 통증도 있지만 그럭저럭 견냈다. 의사도 물리 치료사도 없는 주말에는 혼자 보기를 밀며 복도를  바퀴쯤 돌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경외과 쪽과의 협진은 진행되지 않았다. 누구도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곳으로 온 이후로 외과 쪽 의사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 내겐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그 협진이 왜 그리도 어려운 문제을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그래서 배운 것 많다. 독일 사람의 멘털은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단순한 걸 놓치기 쉽다. 독일 남편과 살면서 가끔 느끼던 것인데 이번에 병원에서 집단으로 느꼈다고 할까. 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타협의 여지가 없고 옆도 뒤도 절대로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 매뉴얼 없이는 융통성 순발력 휘한거나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것. 물롡그들 식으로 해서 잘 되면 지만. 내 경우도 제발 그렇게 되바랄 수밖에.


설날이라고, 뮌헨의 친구 M이 병원까지 들고 와서 차려주고 간 한 끼 밥상 앞에서 감격의 눈물과 함께 게 눈 감추던 먹었던 점심.


오랜만에 아이가 왔는데 시누이 바바라까지 따라와서 불편했다. 써 세 번째다. 이가 편하게 느껴지는 건 꾸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난들 알겠나. 내 몸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조치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향후 일어날 일과 대응책을. 당장 시작해야 할 항암조차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집으로 퇴원은 언제 가능한지도. 누가 누구에게 물어도 잘 모를 병원 절차에 대한 질문보다는 현재의 내 감정 상태에 포커스를 맞춰 질문을 면 좋으련만 그런 건 또 잘 못하신다. 나 역시도 시누이에게 뾰족하게 해 줄 말이 없다. 향후 병원에서 할 일이라면 남동생인 내 남편에게 다 들었을 테고 내가 거들 말이 별로 없기 때문.


다만 나는 파싱 방학을 해서 기분이 좋아진 아이와 간만에 병과 상관없는 수다를 좀 떨어볼 요량으로 이제나저제나 목 빠져라 아이를 기다렸는데. 사춘기 아이는 누가 옆에 있으면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파파 있을 때는 괜찮다. 우리는 한국말을 하고 파파는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단어들만 몇 개 듣고 우리의 대화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짐작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이와 내가 대화할 땐 우리의 집중을 방해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내용일 때는 나중에 내가 따로 브리핑을 해주기 기 때문에. 하지만 대부분은 별 거 없다. 딸과 엄마의 수다에 딱히 중요할  뭐가 있겠나. 남편도 그것을 는 것 같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뭐가 궁금한 게 그리 많을까. 물론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의 모국어를 쓰면 예의는 아니지. 그런데 그걸 무척 싫어하고 무슨 얘길 하는지 꼬치꼬치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이 친구 중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다. 그럴 땐 피곤하다. 내 아이와 모국어로 말도 한마디 못 하나. 날 바바라의 등장이 내게 그런 피로감을 안겼다. 아이는 말이 없고, 내가 아이와 나누는 몇 마디 말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빤히 바라보는 시누이를 보며 결심했다. 당분간 시누이의 병문안은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슈탄베르크의 친시어머니는 아직까지 내게 전화 한번 하지 않으셨다. 이번에는 나 역시 전화를 하지 않다.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셔서 나도 어머니도 서로가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신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시누이를 통해 안부 전했다. 반면 레겐스부르크의 새시어머니는 두 번이나 병문안을 다녀가셨다. 걱정이 돼서 안 되겠다 하시면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와야 안심이 되겠다 하셨다. 두 번 다 밝은 모습으로 어머니를 만났다.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가슴 뭉클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나를 생각해 주시고 걱정해 주시머니의 마음. 오죽하면 친정 엄마에게도 하지 못하는 "사랑합니다, 어머니!"란 오글거리는 멘트가 내 입에서 그냥 튀어나왔을까! 어머니가 떠나실 때.


시누이가 오기 전날 병동에 있던 메틴이라는 중년의 남자 간호사가 말했다. "현재를 즐기세요, 누구도 내일 일을 몰라요. 만나서 반가운 사람만 만나고, 만나서 안 반가운 사람은 만나지 마세요. 그게 현재 내 병을 위한 최선의 방책입니다. 노 스트레스! 인생은 누구도 장담을 못하니까요." 편에게 말했다. 고모는 같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남편이 알겠다고 했다. 매일 나를 위해 새 걸음을 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잦은 수술과 입원으로 종아리의 근육이 빠져서 예전처럼 빠르게 걷기도 힘들지만 매일 걸을 때마다 새 힘이 붙는 것을 느낀다. 시누이를 디스 하려는 게 아니다. 앞으로 퇴원을 하더라도 내게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람 만나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기에. 그런 연습과 노력이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내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 근육을 키워줄 것이라 믿기 때문에.


한국에서 온 설날 소포는 2월의 책!





매거진의 이전글 입춘이 왔다 병원에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