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크리스마스 마켓을 준비하는 달
편지 18
아, 크리스마스 마켓! 11월은 성탄절을 준비하는 달이었어요.
그리운 샘.
수요일 아침 뮌헨에는 안개가 자욱했어요. 그게 바로 며칠 전 우리 반 한나 엄마 레나테가 말하던 초겨울 안개였어요. 레나테 말로는 이런 가을이 없었대요. 보통은 안개로 축축한 늦가을과 초겨울이래요. 그날 아침 저는 요가 수업을 빼먹었어요. 전날 밤부터 알리시아가 콧물을 흘리고 아침에는 재채기까지 했거든요. 감기일까 걱정이 되어 보통 때처럼 버스를 태워 혼자 보내지 않고 요가 선생님께 양해를 구한 후 학교까지 데려다주었답니다. 오전에 간식 먹는 시간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는 한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나가야 하거든요. 그때 쟈켓 두 개를 꼭 겹쳐 입고 나가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그런다고 엄마 말을 들을까 싶지만요.
오늘부터는 집을 따뜻하게 해 놓고 뜨거운 물과 국을 자주 마시게 해야지 다짐하며 카페로 향하는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안개가 덮쳤어요. 마법 같이요. 학교 가는 길에는 분명 없던 안개였는데 어디 숨어 있다가 이렇게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나 싶었어요. 분명 안개에 홀려 그랬던 거 같아요. 카페를 지나쳐 빅투알리엔 마켓까지 갔답니다. 그 사이 마켓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어요. 아, 크리스마스 마켓! 11월은 성탄절을 준비하는 달이었어요. 빅투알리엔 마켓을 지나 마리엔 광장까지 오는 길의 안개가 가장 고혹적이었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이 동화 속 같았어요. 그래서 그림형제 동화 속에 안개가 단골로 등장했나 싶기도 하고요.
시청사 앞까지 오자 그 사이 안개가 옅어지기 시작했어요. 안개가 저보다 빨랐나 봐요. 마리엔 광장도 성탄 마켓 임시 건물 설치로 분주했어요. 11/23(금) 요일부터 성탄절 마켓이 서나 봐요. 시누이 바바라 말로는 주말엔 관광객이 워낙 많아 평일 저녁이 나을 거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바바라의 얼굴에 기쁜 빛이 어리더군요. 독일 사람들은 길고 지루한 겨울을 저렇게 버티는구나 싶었어요. 크리스마스가 겨울이라 얼마나 다행인가요. 호주에 사는 친구 말로는 크리스마스를 비치에서 즐긴다고 하던데 상상이 가시나요?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라니! 그곳 아이들에게 산타는 수영복 차림일까요?
샘.
그날은 마리엔 플라츠 시청사 앞 카페로 갔답니다. 새로 리노베이션 한 빵집의 1층 안쪽 바는 가게에서 사들고 온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바에서 직접 주문해야 하지요. 2층도요.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깜짝 놀랐어요. 무려 4.20유로. 다른 곳의 1.5배였거든요. 본인이 바에 가서 직접 주문하니 팁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요. 커피값이 비싸니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는 덜 보이겠다 싶더군요. 이 카페 2층은 시청사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데 아직 거기서 브런치를 먹어 보지는 못했답니다. 성탄 마켓이 설 때 내려다보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예전에 조카와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와서 바에 앉아 있었더니 마음씨 좋은 젊은 남자 바텐더가 와서 그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준 적이 있었어요. 그날은 아주머니 바텐더가 바를 지키고 있었는데 전형적인 중년 독일 여자답게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더군요. 뒤쪽 출입문이 끓임 없이 열렸다 닫혔다 해서 춥기도 하고 저처럼 오래 앉아있는 사람도 없어 차를 한 잔 더 주문했어요. 그날 아침 저를 매혹시킨 안개를 기리는 페퍼민트 차 한 잔. 덕분에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안개에게 고마워해야 할 판이네요. 아, 합리적인 독일답게 비싼 대신 카푸치노 양은 딱 두 배였고, 찻물도 뜨거워 오랫동안 식지 않아 만족했답니다.
제 옆에 잠시 앉았던 독일 할머니 얘기도 해야겠네요. 높은 의자에 좁고 긴 4인용 테이블이었는데 제가 입구 쪽에 앉아있어 들고 날 때 불편하셨던 모양이에요. 이럴 때 독일 사람들의 합리성이 빛을 발하죠. 자기가 앉았던 안쪽 자리를 가리키며 '저 안쪽 자리에 앉는 게 너에게도 편하지 않을까?' 이럴 땐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고 웃는 얼굴로 권유합니다. 저요? 진심 이런 상황이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 그렇겠네요. 감사해요!' 할머니와 저는 미소 띤 얼굴로 한 번 더 인사를 나눴고요. 잠시 후 카페 밖으로 나오자 해가 나진 않았지만 마리엔 광장은 오전의 활기로 가득 차고 있었어요. 안개는 제 갈 길을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고요.
샘.
서울의 12월은 무엇으로 바빴는지 생각이 잘 안 나요. 겨우 1년 전의 일인데요. 아침 나절의 안개 소행이지 싶네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에 나오는 망각의 안개 말이에요. 잘 잊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일 수 있음을 알게 한 작품이었죠. 알고 보니 그날은 한국의 수능일 전날이었어요. 갑자기 왜 이리 춥나 했더니 그렇더군요. 한국의 수능 찬바람은 뮌헨까지 불어오네요. 그날 최고 온도는 10도였는데 수능일부터 차차 기온이 떨어져 다음 주에는 최고 온도가 2도래요. 겨울이 오긴 오나 봐요. 오래 머물러 준 가을을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아요. 더 잡으면 신파 밖에 안 되잖아요. 나뭇잎을 보내는 나무처럼만 하면 되겠지요. 이래저래 가을에게 배웁니다. 작별의 말은 간단히. 안녕, 가을..
p.s 알리시아는 그날 감기에 걸리지 않았답니다. 운동장에 나갈 때 엄마가 시키는 대로 쟈켓을 2개 껴입었대요. 건강해서 참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