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하다면 현재에 사는 것

편지 20

by 뮌헨의 마리


"혹시 망한다 하더라도 삶은 무너지지 않을 것."



그리운 샘.

강원도 동해시에서 북바인딩 스튜디오 '안녕 늘보씨'와 게스트 하우스 '단순한 진심'을 운영하는 류하윤 작가와 최현우 작가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어요. 경쟁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자유롭게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사는 20대들. 오마이뉴스(글 최다혜, 편집 최은경)에서 소개하는 미니멀리스트인 두 사람의 인터뷰 중 최현우 작가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도네요.


"노자가 말하길, 기분이 우울하다면 과거에 사는 것이고, 불안하다면 미래에 사는 것이며, 평온하다면 현재에 사는 것이라 했어요. 이 말을 지침으로 삼아요. 난 현재에 사는가, 미래에 사는가, 아니면 과거에 사는가. 가능한 현재에 살기 위해 노력해요."


아직 스물의 절반밖에 가닿지 않은 두 사람이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저런 소신과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가. 저토록 젊은 나이에.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도 마음이 놓였어요. 인터뷰 중에 싸고 건강한 감자 한 알과 토마토 얘기도 나오더군요. 그걸로 괜찮다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오전엔 북바인딩 일일 강좌를 열고, 남는 시간엔 자전거를 타고,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고, 그리고 스페셜티 한 잔. 그걸로도 충분한 삶.


저는 그럴 수 있겠다 진심으로 믿어요.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어쩌면 그런 단순한 사실을 깨닫기 위함인지도 모르고요. 모두가 그들처럼 살 필요는 없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건 반가운 일이죠. 듣기만 해도 든든하고요. 나이가 많건 적건, 누가 뭐라건, 자기 뜻대로 묵묵히 밀고 나가는 사람을 만나는 건 즐겁잖아요.

스무몇 살 맑은 얼굴이 이런 말도 전해주네요. 걱정하지 않는다고요. 혹시 망한다 해도 삶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요. 이십 대의 노자가 살아 돌아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실패해도, 비록 망한다 해도 무너지지 않는 삶. 저녁 무렵 뮌헨에서 전해 듣는 젊은 노자의 한 마디에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요.



월요일 카페에 출근한 저는 평온하지 않았어요. 주말에 이틀 동안 새 할머니 댁에 다녀오느라 글을 하나도 못 썼거든요. 1시간 반 동안 독일 기차 안에서는 LTE도 터지지 않았고 창 밖엔 안개만 자욱하더군요. 뮌헨으로 돌아오자 마음만 분주했어요. 그러다 카페 창 밖의 나무 두 그루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아직도 연초록 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들요. 멀고 먼 동해시에 살고 있는 그들처럼요. 뒷배경인 하늘은 어제도 오늘도 맑았다 흐렸다를 열두 번도 더 왔다 갔다 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흐려야 맑아지고, 맑아지면 또 흐려지지요.

노자의 말을 들으며 저에게 평온을 주는 건 무엇일까 곰곰 생각했지요. 아침의 카푸치노 한 잔이 아닐까요. 이번 주는 안정감을 주는 새 여자 바리스타가 갈색과 흰색이 반반인 카푸치노를 내려주네요. 테이블 위에 노트북과 책을 내려놓고, 창 밖의 나무 두 그루와 하늘을 바라보며 마시는 카페의 카푸치노. 식기 전에, 따듯할 때, 남김없이 마시는 아침의 카푸치노. 거친 거품은 적고, 부드러움은 넘치는. 오늘은 플레인 크라상 말고 노란 크림이 든 크라상을 같이 먹었어요.


샘.

슬픔에 중독된 사람.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지도 몰라요. 슬픔은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으니 그 역시 밑지는 일은 아닐 거예요.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를 들으며 가장 먼저 슬픔을 느끼는 사람을 저는 좋아합니다. 슬픔은 낮고 느리고 고요하고 평온하지요. 슬픔이 없는 아름다움이 가당키나 한가요. 이런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단계를 평온의 시간이라 부르고 싶네요. 샘 말씀 대로, 슬픔이 낯설지 않아 살 만하게 되기를, 더는 어리석지 말기를 주문처럼 자신에게 속삭입니다. 저 역시 욕심이 지나칠 때 늘 어리석었던 사람이거든요.


뮌헨에는 아침에 반짝 해가 났어요. 해는 1시간도 머물러 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했답니다. 카푸치노는 마셨고, 글은 다 썼고, 읽을 책도 남아 있고, 반가운 안부는 벌써 도착했으니까요.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우리 자신과 편하게 지내는 일뿐. 오른쪽 테이블엔 30대 연인들의 다정한 입맞춤. 왼쪽엔 20대 딸들의 수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할머니의 신문 삼매경. 3시간 후 창 밖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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