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친구이든 적이든

편지 23

by 뮌헨의 마리


"당신이 친구인지 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저에겐 영광입니다."



그리운 샘.


드디어 어제 알리시아와 나니아 연대기 대장정을 끝냈답니다. 4월에 5장 750쪽까지 읽고 남은 두 장은 300여 쪽. 알리시아도 저도 다시 열정을 되찾아 흥미진진하게 읽었음을 고백해야겠어요.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 많아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색연필을 집어들고 줄을 긋느라 몇 번 지체했더니 어제는 못 참겠는지 이렇게 고함을 지르더군요. '빨리 줄 긋고 계속 읽어 줘!' 이번에도 책을 읽다가 이랬거든요. '아, 이 문장 너무 멋있다!' 나니아의 멸망 후에도 살아남아 새로운 나니아에서 재회한 옛 적국의 병사가 던진 말이었어요.


"당신이 친구인지 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저에겐 영광입니다. 한 시인이 말하기를, 고귀한 친구는 최상의 선물이고, 고귀한 적은 그 다음가는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친구가 아니라 '고귀한' 친구라니요. 그냥 적이 아니라 '고귀한' 적이라니요. 이런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뜁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이 안겨 주는 최대치가 아닐까요. 전날에는 이런 문장도 건져 올렸답니다. 나니아의 마지막 왕인 티리언 왕과 그의 분신과도 같은 말하는 유니콘의 대화입니다. 마지막 결전을 앞에 두고 죽음을 각오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가슴을 저미는 대화입니다.


"주얼, 이별의 키스를 나누자, 이 밤이 우리가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 테니까. 내가 크든 작든 네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용서해다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제가 폐하를 용서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 커다란 기쁨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슬란 님께서 저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 하더라도, 저는 제가 살아온 삶 외에는 그 어떤 삶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 외에 그 어떤 죽음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이런 고귀한 작별의 말이라니요!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자 삶이자 죽음 아닐까요.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건넬 수 있는 관계란 얼마나 아름답나요.



"나니아 다 읽었다고 써야지! 장선생님께 고맙다고 안 할 거야?"


책을 덮고 나자 알리시아가 말했습니다. 누가 안 한다고 했나요? 엄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다만 아름다운 말들을 음미하느라 잠시 쉬었을 뿐인데요. 새어머니댁을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온 사흘 동안 집 정리도 하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글쓰기가 늦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답니다. 엄마를 얼마나 불러 대는지 어떤 일에도 30분을 집중할 수가 없었거든요. 돌아서기만 하면 배가 고프다, 자기가 하는 걸 봐 달라, 잠시만 와라, 기타 등등으로요. '니 배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니?' 그러자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네요.


"네, 피자도 들어 있고, 계란찜도 들어 있고, 밥도 한 스푼 들어 있고, 물도 들어 있습니다!"


물어본 제가 잘못이지요. 전날 고모 생일에 이태리 식당에서 혼자서 피자 마르가리타를 한 판 시켜서는 절반도 못 먹고 싸들고 왔던 걸 오늘 아침에 오븐에 데워 줬거든요. 계란찜은 계란을 무려 3개나 넣고 멸치 다시에 액젓으로 간을 맞췄더니 맛있다며 그릇째 끌어안고 먹었고요. 밥도 같이 먹으라고 국물을 자작하게 했는데 딱 한 숟갈만 먹더라고요.


다시 처음의 문장을 말했던 사람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젊은이였으며, 나니아의 적인 칼로르멘 사람답게 가무잡잡하고 거만한데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마침내 나니아를 사랑하게 된 그 늠름한 전사가 이렇게 말하는군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상처 입은 사람처럼 마음이 여려졌습니다..."


샘.

너무 행복하여 상처 입은 것처럼 여려진 마음까지 고귀해지는 연말입니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지 조급히 헤아리던 날들로부터 멀리 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해도, 이룰 무엇조차 없어도 매일의 삶은 고귀합니다. 내년에도 글쓰기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매일매일 충실하게 쓰겠습니다. 만남도 관계도 고독도 내려놓고요. 갈 인연은 가고 올 인연은 오겠지요. 그렇게 정리하자 마음이 평안합니다. 2018년이 이틀이나 남아 있는데 연말 결산을 끝낸 기분이 들지 뭔가요. 이 가벼움, 이 홀가분함이라니요. 샘의 연말도 너무 무겁지 않으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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