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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Feb 19. 2019

그다음 날 글을 쓰지 못했다

크리스탈 삼촌의 눈물


크리스털 삼촌을 우연히 만난 것은 우반역에서였다. 크리스털에 관한 글을 쓴 직후였다. 그가 크리스털을 못 키우겠다고 한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오늘 아침은 학교 미사가 있는 날. 7시 35분에 학교에 도착했다. 미사 시간은 7시 45분. 참석 대상은 초등 2년~4년까지다. 학부모들도 참석을 독려하지만 오늘은 학교 미사에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오에 독일어 과외가 있어 독일어 작문 숙제와 글쓰기를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학교 앞에 도착하는 순간 택시에서 내리는 크리스털을 보았다. 택시 앞에서 기다리던 초등 매니저 프라우 볼프 Frau Wolf 선생님이 크리스털을 데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얼마 전 아이의 방과 후 선생님이 크리스털과 함께 하교하는 것을 보고 크리스털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시는 거냐고 물었더니 택시를 기다리는 중이라 하신 게 기억났다. 그 선생님이 대답 후에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신 것만 보아도 사안이 중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함부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 무렵 크리스털 얘기가 나오자 율리아나 할머니가 하신 말씀도 생각났다. 독일에서는 친부모라 할지라도 아이를 폭행하거나 학대하거나 비슷한 일이 발생하는 순간 지체 없이 아이가 보호소로 격리된다는 것이었다. 진실 여부는 추후에 밝혀지겠지만 아이가 그런 사실을 입에 올리는 순간 바로 시스템이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놀랍기도 했지만 솔직히 전율이 일기도 했다. 작년에 아이에게 들은 말이 생각나서였다. 크리스털 삼촌이 밥주걱으로 크리스털 머리를 때렸다고. 학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크리스털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서 아프리카의 정서와 아시아의 정서와 유럽의 정서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삼촌과 함께 산 세월이 제법 되지만 삼촌께 맞은 기억은 없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인 데다 다혈질이었던 우리 삼촌은 화를 자주 내셨고 칭찬보다는 야단에 더 익숙한 분이었다. 하지만 그 세대 아버지들이 다 그러시지 않았나. 신기한 건 체벌은 없었다는 것. 잊어버렸는지는 몰라도 아마 있었다 하더라도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삼촌이 화를 많이 내신 데에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집안 형편과 질녀 둘까지 떠안아야 하는 지나친 책임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털 삼촌을 우연히 만난 것은 우반역에서였다. 크리스털에 관한 글을 쓴 직후였다. 프라우엔 호프 슈트라세 역에서 집으로 가는 우반을 기다리는데 낯익은 흑인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크리스털의 삼촌 제프리였다.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만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그가 물어왔기 때문이다. 우반역 벤치에 앉아 어떻게 지내냐고 묻자 솔직히 잘 지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고, 눈은 충혈되었다. 이런 일이 생기고 어떻게 잠을 잘 잘 리가 있겠나. 평소 그가 보여주던 활기와 쾌활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크리스털을 못 키우겠다고 한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묻자 그가 양손을 내보이며 자기도 정확한 사유를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는다고. 그날은 상담을 가는 길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때 아프리카에 다녀온 사이에 생긴 일이라는 말과 함께. 크리스털을 자주 돌봐주던 독일 여자분과 크리스털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같이 보냈는데 그분이 크리스털에게서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아이들이란 정직할 땐 천사보다 정직하지만 과장하는 경향도 있으니까. 실제로 삼촌이 때렸을 수도 있다. 삼촌이 그것을 폭행이나 학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고.


그날 그의 설명이 어찌나 장황하고 정신이 없던지 나는 그의 말을 이해는커녕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마음에 날아와 박혔다. '크리스털은 내가 돌 무렵부터 키워온 애야. 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을 때였어. 그때부터 내 손으로 키운 애라고.' 커다란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악어의 눈물은 아니었다. 아, 어쩌다가 외국에 살면서 이런 일이 생겼나. 안타까웠지만 그 정도로는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고, 내가 나설 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안도 아니란 건 확실했다. 다행히도 하교 때 본 크리스털의 얼굴은 대체로 평온해 보였다. 얼마 전 크리스털이 이렇게 말했단다. 새로 사는 곳도 나쁘진 않은데 집에서 다니고 싶을 때도 있다고.


그다음 날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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