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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Feb 07. 2019

시빌레의 두루마리 예언서와 토정비결

<그리스 로마 신화>


경애하는 토정비결이여, 뒤늦게 나는 철이 들었다. 요즘은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 우물만 파고 또 파는 중이다.  



쿠마이의 시빌레*는 한 줄, 한 줄 예언을 써 내려갔다. 시빌레는 창 밖의 풍경을 보듯 미래를 볼 수 있었으며, 자신의 말라비틀어진 손으로 보이는 것을 모두 적었다. 시빌레는 모두 아홉 권의 두루마리 예언서를 들고 로마로 갔다. 당시 로마는 여섯 명의 훌륭한 왕에 이어 일곱 번째 왕인 거만한 왕 타르퀸이 군림하고 있었다. 타르퀸은 폭군이자 독재자였다. 그에게서 사랑과 의무라는 로마인들의 미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시빌레는 타르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늙어 등이 구부러진 여인 시빌레는 타르퀸을 향해 승부수를 띄웠다. 금화 백 잎으로 아홉 권의 예언서를 사라는 것이었다. 타르퀸은 그녀를 조롱하며 미치광이의 낙서에 금화 백 잎을 내지는 않겠노라 큰소리친다. 그러자 시빌레는 들고 간 바구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불을 붙여 왕 앞에 던졌다. 이제 여덟 개가 남았다. 불타오르는 두루마리를 보는 왕의 마음은 불안했지만 동시에 모멸감으로 치를 떨었다. 노파는 지체 없이 두 번째 두루마리를 태웠다.


아무도 시빌레를 쫓아내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쿠마이의 시빌레와 그녀의 예언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빌레가 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은 두루마리는 일곱 개. 가격은 천으로 올랐다. 살 텐가 말 텐가. 타르퀸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세 번째 두루마리도 한 줌의 재로 왕 앞에 던져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며 술렁거렸다. 미래 그 자체가 불타오르는 듯했기에. 타르퀸은 눈 앞에서 '로마'라는 글자가 까맣게 그을려 재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왕은 분노로 소리쳤다. 미친 노파의 헛소리에 금화 천 잎을 줄 바보는 아니로다. 예언자가 대답했다. 현명한 가르침은 지혜로운 자보다 바보에게 더 필요한 법. 내가 당신 앞에 있는 이유로다. 이제 값은 이천!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주를 퍼붓는 사이 네 번째가 불탔고, 삼천으로 가격이 오른 다섯 번 불타는 두루마리에서 타르퀸은 시빌레가 휘갈겨 쓴 자신의 이름을 보았다. 누구도 왕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이 금화를 지불하기만을 애타게 바랐다. 그들의 눈 앞에서 그들의 미래, 자손들의 미래, 그들의 도시, 그들의 세계가 불타 없어지고 있었으므로.



당연하게도 타르퀸 역시 예언서를 몹시도 갖고 싶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가를 입은 정치가들과 전쟁으로 무자비해진 장군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 여차하면 이들이 자신을 단도로 찌르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여섯 번째 두루마리는 예언자를 벌레 취급하는 그의 무례함 때문에 또다시 불태워졌다. 마침내 거만한 왕이 예언자와 예언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빌레의 저명한 아홉 권의 예언서는 세 이 남았고, 예언서 연구에 돌입했던 로마의 현인들이 시빌레의 필체를 알아보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듯 몸부림을 쳤다는 후문이 들렸다. 그리고 왕은 어떻게 되었냐고? 사람들의 반란으로 쫓겨났다.


집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서류들을 발견했다. 쳐다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 서류가 대부분이었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끈 것이 토정비결이었다. 무려 15년 전 자료였다. 결혼하고 독일에 살던 시절에 인터넷으로 새해 토정비결을 출력해 놓았던 모양이다. 내 생년월일을 넣고 뽑은 것이니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신기했다. 불태워진 시빌레의 예언서처럼 내 토정비결도 열 장 중 뒷부분 세 장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에도 궁금하지는 않았다. 예언서에 적혔든 아니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몇 가지 대목을 공개하자면 이렇다. 직업에는 특별히 나쁜 것이 없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어떤 직업이라도 무난하지만 단지 한 우물을 꾸준히 팔 것. 호기심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집중이 어렵고 싫증을 잘 낸다. 정 때문에 금전 관리가 잘 안 되고, 사람 관계 시 맺고 끊는 것이 어려울 수 있으니 매사에 공과 사를 구별할 것. 한 곳에 머물러있기보다는 활동적으로 움직일 것. 해외로 나가서 일을 하거나, 아예 머무르면서 기거하는 것이 좋다. 초년보다는 중년 말년으로 갈수록 안정을 취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토정비결이 내게는 시빌레의 예언서와 맞먹는 효력을 발휘하며 마지막 구절에서는 신탁인 양 '경애의 마음'까지 갖게 된다.   


운세에 연애와 결혼을 빼면 무슨 재미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연애를 하는 형으로 깊게 생각하거나 서로를 구속하는 것을 싫어한다. 설마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하고 싶은 욕망이 넘쳐 이것저것 일을 만들어 놓는 형이다. 하지만 다 수습하지는 못해 결실이 없다. 말이 앞서고 계획에 의해서 진행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상대방은 현실성이 있어서 자신을 절제시켜주고 직언을 해 줄 수 있는 타입을 만나는 것이 좋다. 받아만 주는 자와는 현실적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이를 어쩐다. 남편이란 분은 받아만 주시는데. 경애하는 토정비결이여, 뒤늦게 나는 철이 들었다. 요즘은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 우물만 파고 또 파는 중이다.      


   

*<로마 신화(마루벌, 제럴딘 맥코린(글), 에마 치체스터 클락(그림), 정희경 옮김)>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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