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일어 샘
린다는 나의 독일어 샘이다.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그녀가 선생님으로서 어떨지는 나로서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첫 미팅으로 받은 인상을 말하자면 찬찬한 타입인 듯했다.
린다는 나의 독일어 샘이다.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으니 그녀가 선생님으로서 어떨지는 나로서도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첫 미팅으로 받은 인상을 말하자면 찬찬한 타입인 듯했다. 우리는 수요일 오전 11시에 만나 1시간 남짓 차를 마시고, 통성명을 하고, 개인사를 묻고, 서점을 방문했다. 첫 번째 약속은 월요일이었다. 하루 전날 린다에게서 문자가 왔고, 약속을 수요일로 미뤘으면 했다. 노 프라블럼! 뭐가 문제인가. 내게는 시간이 넘치고 넘치고 또 넘치고, 오늘 만나나 내일 만나나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좋은 사람이기를,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약속을 미룬 건 잘한 일이었다. 지난주는 어쩐 일인지 주말에 가까워질수록 기운이 가라앉아서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속도마저 떨어졌고 금요일엔 완성조차 못했다. 여름에 써 둔 시 한 편에 어쩌다 손을 댔는데 시는 시대로 미완성인 채로 산문에 대한 감각마저 순간적으로 놓쳐버린 탓이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다시 린다를 만나는 수요일 오전. 어렵사리 글을 올리고 숨을 고르는 사이 그녀가 왔다. 린다도 나도 서로를 금방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에겐 더 쉬웠을 것이다. 검은 머리만 찾으면 되니까. 나도 그녀를 금방 알아봤다.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이 그 카페에 따로 있을 리 없었으므로.
그녀의 첫인상은 뭐라고 할까, 요즘 내가 즐겨 읽는 별자리 책 작가 같았다. (오, 그녀의 이름도 린다였다!) 맞다, 그녀는 작가다. 내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 처음 그녀를 소개한 건 조카였다. 물론 조카가 린다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조카가 일하는 한식당의 누군가가 린다에게 과외를 했다. 작년에 처음 조카에게 린다 얘기를 들었을 때는 글쓰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책과 글쓰기에 대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학 모임에도 나가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조카가 말했다. 이모, 그 독일어 과외 샘도 작가래요. 조카에게 린다의 연락처를 부탁했다.
린다에게 소지품을 봐달라고 부탁한 후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바에서 그녀를 위한 카푸치노 한 잔과 맛있는 디저트 두 개를 주문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녀는 낯선 남자와의 첫 만남을 기다리는 여자처럼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작고 아담한 몸매였다. 금발 머리에 얼굴에는 살이 없었다. 특히 눈빛이 특이했는데, 우리가 하늘색이라고 지칭하는 색깔이었다. 라이트 블루!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형님네 조카 빼고는 블루 눈을 가진 사람과 그렇게 가까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도 차분했고 그것이 신뢰감을 주었다.
그녀는 내게 몇 가지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고 말했다. 러시아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스페인어. 이태리어도 아니고 러시아어를? 그렇게 어려워 보이는 언어를 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파리냐 뮌헨이냐. 두 도시를 놓고 고민하다가 뮌헨으로 왔다고도 했다. 15년을 살던 슈투트가르트에서 뮌헨으로 온 게 작년 봄이란다. 이런! 우린 둘 다 뮌헨의 이방인이었구나. 린다의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 역시 작년에 뮌헨으로 왔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다른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시간을 정하는 것은 쉬웠다. 둘 다 오전에는 글쓰기를 원했으므로 매주 화요일 정오에 만나기로 했다.
린다의 전공은 철학과 문학이었다. 어느 문학인지는 가물가물하다. 독문학이라고 했는지 불문학이라고 했는지 헷갈리는 이유는 그녀가 작가로 성공하면 꼭 프랑스로 가서 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이 사뭇 상기되었기에 나도 모르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린다, 왜 툴라에서 바로 프랑스로 가지 않았니? 그 대화 직전에 그녀가 툴라에서 태어나 독일로 왔다고 말해주었기에. 그래서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거라고. 아하, 러시아어가 모국어였구나. 툴라? 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지명인데. 린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톨스토이 알지? 오, Toll(Great)!!!
후겐두벨 서점으로 같이 가 보자고 먼저 제안한 건 린다였다. 어린이 책, 청소년 책, 문학책, 어떤 책이든 좋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린다는 몇 년 간 서점에서도 일했단다. 린다가 권한 건 파울로 코엘료였다. 문장이 복잡하지 않다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책이든 좋았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보니 현재는 없단다. 한 때는 토마스 만을 좋아했다고. 내가 원하는 책을 정해서 알려주기로 하고 서점을 나왔다. 햇살이 비치는 거리에 서서 그녀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돌아서기 직전에 린다가 말했다. 우리 조부모님이 독일계야. 그래서 독일로 왔어. 할아버지가 전쟁 포로셨다고.
린다가 가까운 미래에 프랑스로 가서 살게 되면 좋겠다. 4년 이상 써오고 있다는 소설을 올봄에 꼭 출간했으면 좋겠다. 좋은 에이전시를 만나 작가로서 멋지게 출발하면 좋겠다. 언젠가 작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그리하여 파리든 프로방스든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기쁘고 행복하면 좋겠다. 그 아름다운 언어를 마음껏 발음하면서 말이다. 그보다 먼저 나 역시 그녀와의 우정을 벽돌 쌓든 차근차근 쌓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녀와 함께 읽은 책들이 봄꽃처럼 가을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이기를 바란다.
린다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파리로 출장을 떠난 남편의 톡이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남편은 정오에 파리에 안착, 호텔 체크인까지 마쳤단다. 내게는 그 소리가 마치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파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파리의 향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눈만 감으면 바삭하고도 부드러운 갓 구운 바게트 향이 코로 입으로 스며들 것만 같았다. 결혼하기 전 잠시 가 본 파리가 내가 아는 다였다. 다시 간다면 에펠탑 말고 오래오래 산책하고 싶던 뤽상부르 공원. 다시 가면 카페와 책방 순례도 해야지. 루브르에게는 미안하지만 미술관은 오르세와 피카소만. 어쩌나, 봄은 아직 멀었는데, 내 마음을 이토록 흔들어 놓는 너, Paris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