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은 왜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가. 지난 일은 지난 일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좋겠다 싶었다.
어제는 입추였다. 작년 입추에 뮌헨에는 비가 내렸다.이번 주 서울은 시작부터두 번이나37도를 찍고 이후에도계속35도에육박하고 있다. 한국에 올 때부터 각오를 한 탓인지 외출을 자제해서인지 지금까지는서울의 폭염을 그럭저럭견디고있다.어제가 입추라는 걸 알고는 바람에 가을을 느꼈다면 너무심한가. 저녁 무렵 친구를 기다리며 그랬다는 말이다. 오전에는교대의예전단골 꽃카페에서 아이의 친구이기도 하고 내 친구이기도 한 연지네를 만났다. 그 사이 두 동생들은 컸고, 연지는 예쁘고 차분한 초등 5학년이 되었다.
카페 사장 언니도 그대로였다. 단발에 키가 크고 선한 표정에 아이에게 꽃을잘주던 사람. 어제도 아이는 작은 꽃다발을 선물받았다. 예전처럼. 그럴 때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오래 알던 사람이란, 오래 가던 카페란 이리도 정다운 존재로구나. 꽃을 받든 안 받든. 카페에서는 아이가 좋아하던 와플을 먹고 연지네와 카페 오른쪽 교대 밥상에 들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옛날 돈가스를 한두 점 먹어봤는데 더위에다시입맛을 잃었는지맛을알지못했다. 내가 주문한 고등어 조림은 무척매웠으나연지 엄마가 좋아하던 제육볶음을 사 줄 수 있어 좋았다.
연지 집에서 연지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온 내력이 비슷한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이 잘 되는 편이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아이들을 사랑으로 안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황소 고집에다 생떼를 쓰는 아이를 보며 스스로의 인내심에 한계를 느낄 때. 그럴 때마다 수도 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죄책감이 뒤따른다고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누구라도 천사표 엄마가 될 수도 그럴 필요도없는데. 우리는 성인군자가 아니지 않나. 남편에게 헌신하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세 아이들과 살아가는 그녀에게 누가 그런 완벽함을요구할 수 있겠나. 그러니 연지야, 힘 내..
저녁 무렵 다시 교대의 그 꽃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약속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바람은불어오고 석양빛도가늘어졌다. 차소리. 옆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영화 음악. 간간이 오토바이 지나는 소리. 끊어졌다 이어지는 매미 소리. 교대 쪽은 1년 반 사이 변해있었다. 떠날 때보다 가로수잎들이무성해졌다. 바람은 입추답게 불어오고햇살은 따갑지가 않았다. 정다운 옛 카페가 남아있다는 것. 거기에앉아 책을 읽었고, 거기서 오월의 다알리아를 만났고, 거기서그리운당신들을만났다.
야외 테이블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분주히추억의 문을 열고들어오고나갔다.아직까지만나는 사람도 있고, 마음의 빗장을 닫은 사람도 있었다. 기억 속의 얼굴들을 지켜보고 싶은 생각에 기다리는친구가 빨리 왔으면 싶은마음과 늦게 왔으면 싶은 마음이 반반이었다. 이 순간이 조금 더 지속되기를. 아주 잠시만 더. 저녁의 햇살은 더욱 아래로 눕고,미풍은온 몸을부드럽게 쓸고갔다. 지난 일은 왜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가. 지난 일은 지난 일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좋겠다 싶었다.
기다리던 친구와는 카페 왼쪽에서 밥을 먹고 카페로 돌아와 차를 마셨다. 우리는 대학 시절에 만났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지낸 세월도 많았다. 그럼에도 언제라도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다시만날 수 있었다.늘 소녀 같은 친구도 어느 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은 평등하구나. 25년 동안 대기업에서 일했던 친구는 연말에 일을 그만 둘 생각이었다. 영어를, 민화를,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놀라워라! 변화란 언제나 기분 좋은 것. 나든 친구든 남이든. 더더구나 입추에, 이 바람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