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빚이라는 것. 내가 원했건 아니건 받은 건 사실이니까. 곡간에 곡식 쌓이듯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 사라지는 게 뭔가. 나잇살 먹듯 무게만 더해갔다.
영풍문고에서 친구를 만났다. 내 친구 H를. H와는 접점이 없다. 중고교 동창도 아니고 대학도 다르다. 그렇다고 영 인연이 없는 사이도 아니다. 고등학교 때였다. 불교 학생회 연합 동아리에서 처음 H를 만났다. 내 평생여자 친구가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긴 그 시절엔 여중고를 다녔기에 이성보다 동성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게 자연스러운 구조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때 내가 뭘 알았겠는가. 친구가 그렇게 나를좋아하는 게 부담스럽기만 했다. H와는 고등학교 때잠시 만난 후 서로 보지 못했다.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공무원이 되고 친구는 은행원이 되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고. 내가 자기만큼반갑게 알은 체하지는 않더라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친구는 어제 일처럼 그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H를 만난 건 10년 만에 한국에돌아왔을때였다.
H가 서울 본사로 갔다는 말은 다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여자라고 서울로 발령을 내면 못 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단연코 그런 친구가 아니다.투철한 노력과 철통 같은 능력으로무장한 친구였다. 늦은 나이에 귀국해서 부산에서 아이를 낳고 서울로 올 때 가장먼저 생각난 것도 H였다. 내가 생각해도이상했다. 확실한 건 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 나중에 깨달은 사실인데 사랑도 빚이라는 것. 내가 원했건 아니건 받은 건 사실이니까. 곡간에 곡식 쌓이듯 무의식 속에차곡차곡 쌓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사라지는게뭔가. 나잇살 먹듯무게만 더해갔다.
예전부터 나는광화문의 교보문고보다 종각역의 영풍문고를 좋아했다. H가 일하는 건물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아이와 한적한 어린이 책 코너 바닥에 앉아 책을 읽다가 일을 마치고 내려온 친구와 저녁을 먹던 다정한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H는 친구의 아이까지도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아이들에게무덤덤한 편인 나와는 달랐다. 서울에 살던 5년 동안 H 집에 초대를 받은 적도 많았다. 맛있는 수육과 맛깔난김치가있던 밥상. 다시 만나도 친구의우정은 계속되었다.
어제도 그랬다. 저녁으로 단품 하나만 먹어도 되는데 깔끔하고 비싼 곳에서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수육과 서늘한 묵사발과 두툼한 빈대떡 그리고 어쩌다 번지 수가 틀리게 배달된 모둠전을 서비스로 먹었다. 몸도 약한 친구가 나이 오십이 넘어 명퇴까지 거부하고 땀 흘리며 번 돈으로 얻어먹는 비싼 밥을 나는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모른다. 몇 번의 도전을 거듭해 원하던 의대에 진학한 큰딸과 고2 아들을 키우며 가장 노릇을 하는 내 친구. 27년째 직장 생활을 계속하며착실하게 3년 후 명퇴를 준비하는 친구.
H와 헤어져 돌아오던 밤. 언니네 집 앞 공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공원은 구청 마당 앞이라 정비가 잘 되어있고 밝고 안전해서 밤늦도록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능소화는 잠이 들고 매미가울었다. 낮에 보았던 참새 세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양이 두 마리가 공원의 주인 행세를 했다. 독일 간 지 얼마 되었다고 이토록 반겨주는 것인지. 그들을 잊지 말아야지. 소홀했던 지난날을덮어주는 너그러운 관계들에게도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도 오랫동안30년이 넘게변함없는 내 친구를생각했다. 어쩌면사람이누군가에게그토록 한결같을 수 있는지, 그게 가능한 건지 신기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