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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ug 10. 2019

영풍문고에서 친구를 만났다

명퇴까지 3년, 힘내라 내 친구!


사랑도 빚이라는 것. 내가 원했건 아니건 받은 건 사실이니까. 곡간에 곡식 쌓이듯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 사라지는 게 뭔가. 나잇살 먹듯 무게만 더해갔다.



영풍문고에서 친구를 만났다. 내 친구 H를. H와는 접점이 없다. 중고교 동창도 아니고 대학도 다르다. 그렇다고 영 인연이 없는 사이도 아니다. 고등학교 때였다. 불교 학생회 연합 동아리에서 처음 H를 만났다. 내 평생 여자 친구가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긴 그 시절엔 여중고를 다녔기에 이성보다 동성 친구와 가깝게 지내는 게 자연스러운 구조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때 내가 뭘 알았겠는가. 친구가 그렇게 나를 좋아하는 게 부담스럽기만 했다. H와는 고등학교  잠시 만난 후 서로 보지 못했다.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공무원이 되고 친구는 은행원이 되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고. 내가 자기만큼 반갑게 알은 체하지는 않더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친구는 어제 일처럼  순간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H를 만난 건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H가 서울 본사로 갔다는 말은 다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여자라고 서울로 발령을 내면 못 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단연코 그런 친구가 아니다. 투철한 노력과 철통 같은 능력으로 무장한 친구였다. 늦은 나이에 귀국해서 부산에서 아이를 낳고 서울로 올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도 H였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확실한 건 친구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 나중에 깨달은 사실인데 사랑도 빚이라는 것. 내가 원했건 아니건 받은 건 사실이니까. 곡간에 곡식 쌓이듯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는 것. 사라지는  뭔가. 나잇살 먹듯 무게만 더해갔.



예전부터 나는 광화문의 교보문고보다 종각역의 영풍문고를 좋아했다. H가 일하는 건물이라서 그렇기도 하고, 아이와 한적한 어린이 책 코너 바닥에 앉아 책을 읽다가 일을 마치고 내려온 친구와 저녁을 던 다정한 기억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H는 친구의 아이까지도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아이들에게 무덤덤한 편인 나와는 달랐다. 서울에 살던 5년 동안 H 집에 초대를 받은 적도 많았다. 맛있는 수육과 맛깔난 김치가 있던 밥상. 다시 만나도 친구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어제도 그랬다. 저녁으로 단품 하나만 먹어도 되는데 깔끔하고 비싼 곳에서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수육과 서늘한 묵사발과 두툼한 빈대떡 그리고 어쩌다 번지 수가 틀리게 배달된 모둠전을 서비스로 먹었다. 몸도 약한 친구가 나이 오십이 넘어 명퇴까지 거부하고 땀 흘리며 번 돈으로 얻어먹는 비싼 밥나는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모른다.  번의 도전을 거듭해 원하던 의대에 진학한 큰딸과 고2 아들을 키우며 가장 노릇을 하는 내 친구. 27년째 직장 생활을 계속하며 착실하게 3년 후 명퇴를 준비하는 친구.


H와 헤어져 돌아오던 밤. 언니네 집 앞 공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공원은 구청 마당 앞이라 정비가 잘 되어 있고 밝고 안전해서 밤늦도록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 능소화는 잠이 들고 매미가 울었다. 낮에 보았던 참새 세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고양이 두 마리가 공원의 주인 행세를 했다. 독일 간 지 얼마 되었다고 이토록 반겨주는 것인지. 들을 잊지 말아야지. 소홀했던 지난날을 덮어주는 너그러운 관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도 오랫동안 30년이 넘게 변함없는 내 친구를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한결같을 수 있는지, 그게 가능한 건지 신기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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