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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ug 12. 2019

C의 갈매기를 보았다

체호프의 갈매기가 아니라


대학 동기인 내 친구 C를 보자 갈매기 생각이 났다. 체호프의 추락하는 갈매기가 아니라 힘차게 날아오르는 부산 갈매기 말이다.



일요일 오전 영등포 역에서 부산행 KTX를 탔다. 내가 체류하고 있는 우리 언니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오전 11시 31분 출발. 부산 도착 시간이 오후 2시 52분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소요 시간이 3시간 21분이니 서울-부산 간  중 가장 오래 걸리는 차편이 아닐까 싶었다. 다음부터언니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서울역에서 금방 가는 걸로 골라타야지!


어제는 말복이었다. 내가 말복인지 중복인지 정확한 날짜를 어떻게 알았겠나. 아침 10시 45분쯤 짐을 들고 언니 집을 나오는데 공기가 달랐다. 선선했다. 아침이고 밤이고 후끈한 바람이 불어오던 골목이었는데. 영등포 역에서 언니가 사 준  가지 종류의 오니기리와 흰 우유 두 개를 들고 기차를 타고는 '말복이 언제?' 하고 네이버 검색을 하자 '오늘이잖아요'라고 뜨더라는 것. 영화 <Her>곧바로 감정 이입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절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


솔직히 말하, KTX에서 보낸 3시간 21분은 조금지루하지 않았다. 에어컨은 쾌적했고, 와이파이는 잘 터졌다. 느리게 살던 독일의 삶에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알라딘의 마법 세계로 이동한 것 같았다. 독일에서 기차를 타면 와이파이가 뭔가. 자체 데이터가 빵빵한데도 인터넷이 터져야 말이지. 성격 급한 나 같은 사람은 속이 먼저 터진다. 그러니 책은 필수. 독일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숫자 퍼즐 스도쿠 미니북들고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친척 언니의 밥상. 직접 담근 장아찌류. 텃밭에서 가꾼 고추가 익어가는 언니집 베란다.


부산에서는 뮌헨에 살고 있는 조카네서 며칠 묵기로 했다. 조카 부모님인 친척 언니가 몇 번이고 오라고 해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 사람 초대란 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이런 것이다. 마음은 받아줄 때 빛나는 것. 언니와 형부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 주었다. 두 분이 맛있는 저녁을 사주고 싶어 했지만 아이가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덕분에 나도 언니 집에서 솜씨 좋은 언니의 몇 년 묵은 김치와 형부가 새벽마다 텃밭에서 일구셨다는 무공해 깻잎과 쑥갓으로 쌈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부산역에는 삼촌 숙모가 사촌 동생 둘과 나와주셨다. 주말 이른 아침에 아이 이빨이 빠졌다는 내 브런치 글 제목만 보시고 내 이빨이 빠진 줄 알고 놀라서 전화를 주신 삼촌. 정년 퇴임이 낼모레신데도 평생 아버지 없이 자란 두 질녀를 염려하시는 마음.  글의 최고 열렬 독자 중 한 분이시란 건 안 보고도 안다. 금요일이 할아버지 제사라 그날 찾아뵐까 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오신 것이다. 마침 그날은 시간이 맞는 대학 선배와 동기가 역까지 나왔는데 차만 한 잔 하고 일어나시며 용돈까지 주고 가셨다. 어찌나 죄송하던지!


내가 사랑하는 온천장의 카페 모모스. 부산 스페셜티 커피의 메카!


선배와 동기와의 만남은 반가웠다. 평소 연락도 없다가 한국 온다고 갑자기 만나자 하기도 쑥스러웠는데 예나 지금이나 부지런한 동기 C가 단톡 방을 만들어주었다. 역까지 나와준 두 사람도 이제는 성실한 가장이자 아버지. 선배의 차로 온천장으로 이동. 내가 좋아하는 모모스 카페에서 선배가 커피를 샀고, C가 친척 언니가 사는 곳까지 동행해 주었다. C는 대학 때부터 우리 가족과도 잘 아는 사이.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를 살면 살수록 느끼게 는 타입이다. 귀찮은 부탁을 거절하는 법도 경조사에 빠지는 일도 없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C의 아내 힘들려나?)


C와는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이자 동료이자 동지 같은 생각이 든다. 만난 지 얼마든 상관이 없다. 언제 만나도 정답고 언제 봐도 반갑다. 한국에 살 때는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초등이던 아들은 고2가 되었다고. 에서도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겠지? 이번에 C에게 들은 말 중 가장 기뻤던 것은 수영을 시작한 지 8년이란 소리였다. 주말 이른 아침마다 해운대에서 수영을 한다고. 그러고 보니 더 건강해진 것 같았다. C를 보자 갈매기 생각이 났다. 체호프의 추락하는 갈매기가 아니라 힘차게 날아오르는 부산 갈매기 말이다. C야, 네 인생 고달팠을 때 내가 몰랐던 것 미안해.


이 나이에 가방까지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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