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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Aug 16. 2019

범어사의 밤

One Summer Night


어젯밤 범어사 입구 주차장에 앉아 한여름밤 피서를 즐겼다. 친구가 선곡한 <One Summer Night>도 들었다. 내 생애 최고의 여름밤이었다.



친척 언니가 사는 낙동강 부근 화명동에서 범어사 쪽 장전동으로 넘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부산에 머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묵고 있는 숙소에 에어컨과 와이파이가 없어서 불편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견딜 만했다. 밤에는 창문을 열어두니 맞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더워서 밤새 선풍기를 돌렸다. 어제는 처음으로 선풍기를 끄고 잤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얼마나 놀라운지.


Y언니와 친구 M과 이틀을 함께 보냈다. M이 집에서 마른 누룽지를 챙겨 오고, Y언니가 밑반찬을, 나는 숙소 아래 슈퍼에서 복숭아 한 상자를 샀다. 둘은 아침마다 정답게 누룽지를 끓여 먹었고, 나와 아이는 숙소 앞 빵집에서 사각 우유 식빵을 사 와서 굽거나 샌드위치로 먹었다. 우유처럼 촉촉한 식빵을 달군 팬에 겉만 살짝 구워서 사각사각 베어 먹는 맛이 좋았다. 이토록 부드러운 식빵은 독일에서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와이파이도 없고, 간만에 친한 친구와 언니와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수다도 떨고, 어제처럼 비 온 날 먹고 싶던 칼국수와 부추전도 먹고, 밤에 범어사 윗길을 차로 한 바퀴 도는 것도 좋아서 오래된 연인을 잊듯 자주 글쓰기를 잊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글을 써야 하는데 와이파이가 안 도와주니 어쩐다, 하며 친구에게 아이가 일어나면 톡을 달라고 부탁하고 잠시 숙소 옆 주민센터로 다. 새 날아온 소식은 없는지 카톡과 독일 왓츠앱을 확인한다. 별 일 없다. 이런 단순한 루틴도 좋다.



부산에는 어제 비가 왔는데 늦은 오후 밖으로 나오니 날이 개어 있었다. 아이까지 포함 여자 넷이 범어사 아래 남산길에 새로 생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자 저녁이 소리 소문도 없이 내려와 있었다. 부산에 오면 아이와 내가 꼭 들르는 범어사 계곡 아래 노란 카페에도 들렀다. 클래식이 흐르는 격조 있는 유럽식 카페. 거기만 가면 시간도, 장소도, 나 자신잊는다. 거기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던 날들이 있었다. 아이 역시 다른 장소는 다 잊어도 그 카페는 기억했다. 나이 드신 주인아저씨께서 훌쩍 큰 아이를 보고 놀라워하셨다.


서울을 좋아하지만 부산은 비교 불가라는 것을 이번에 와보고 알았다. 서울은 타지이지만 부산은 고향 같은 곳. 서울에서 알고 정이 든 사람들도 좋지만 부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혈육 같은 존재였다. 어젯밤 범어사에서 알았다. 밤 9시에 카페를 나와 갈 곳이 어디겠는가. 우리가 있던 곳은 금정산 아래 범어사 길. 부산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집에 돌아오면 꼭 가고 싶은 곳이 바다라면 내겐 범어사가 그렇다. 절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고 부근을 맴도는 것. 옛사랑과 거닐던 추억의 장소를 배회하듯이.


어젯밤 범어사 입구 주차장에는 여름밤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자정까지 머문 팀은 우리 말고는 없었다. 차문을 열어두고 텅 빈 주차장 바닥에 앉거나 누워 노래를 들었다. 김범수의 <하루>을 조용히 들었고, <그대 그리고 나>를 소리 내어 따라 불렀다. 아이가 제발 자기 귀에 대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달무리가 생겼다 사라졌다. 구름이 달 아래 차곡차곡 쌓였다. 바람이 가을을 실어 날랐다. 어린 구름들이 내가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쌩쌩 날다가 들켰다. 마지막엔 친구가 곡한 <One Summer Night>도 들었다. 내 생애 최고의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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