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와서 다시 읽는 개츠비는 여전히 위대했다. 바래지도 변하지도 않는 그의 초록빛 꿈 때문에. 삶 속에서 만나는 개츠비들 또한 위대하다. 건강함과 성실함이라는 일상의 이름표를 달고서.
레아마리네를 방문한 것은 새해를 사흘 앞둔 1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남편은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못 한 일을 만회하느라 바빴고, 아이는 겨울 방학에멀리 사는 친구를 만나고 싶어 했다. 사실은 나 역시 레아마리 맘과 밀린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 가득했다. 독일어가 끼어들 틈이 없는 '순우리말'로 말이다. 날짜를 한참 조정한 후에야 일요일 오전 바이에른 남쪽 지방으로 출발할수 있었다.뮌헨에서 잘츠부르크행 기차를 타고. 중간에 한번 더 갈아타고서.
레아마리 집에서 보낸 이틀 동안 알프스 산맥 아랫동네의 날씨는 푸르고 높고 맑았다. 도착한 첫날의풍경은 이랬다. 아이들은 자기들에게 편한 독일어로, 엄마들은 그립고 다정한 모국어로 지난 시간들을 소환하느라 분주한 모습. 밤에는레아마리 파파에게 양쪽 집의 세 아이를 맡기고 산속 호텔의 색소폰 연주회도 다녀왔다. 겨울밤이 깊도록 전기 장작불 활활 타오르는 바 라운지에서 라이브 연주를 들으며 알코올기 쏙 뺀 달콤한 피나 콜라다를 두 잔씩 마셨다. 레아마리맘의 친구들도 만났다. 밝고 밝은 에너지로 가득한 독일의 젊은 엄마들이었다.
둘째 날은 스키 데이.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에 동네에서 가까운 스키장으로차를 달렸다. 레아마리 맘이 아이들과 스키를 타는 동안 레스토랑 겸 카페인 휘테 Hütte에서 개츠비를 읽었다. 독일에 와서 두 번째로 만나는 개츠비. 처음은 한여름, 두 번째는 한겨울의 이미지로다가온 개츠비. 여름날의 바닷가.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의산책.흰 셔츠에 흰 리넨 바지. 건강한 갈색 피부. 포기할 수도, 잡히지도 않는 열망으로가득한 두 눈. 눈부신 햇살과 겨울 해를 받아 반짝이는 눈, 눈, 눈. 순백의 세상에서도 초록잎을 간직한 나무들.밤새 눈을 맞고도 고개도 허리도 굽히지 않는 나무들. 꿋꿋하고 꼿꼿한 가지 끝에는 금빛 은빛 구리빛의 눈동자들.
열 달 만에 타는 스키에 아이는 한참을 적응하지 못했다. 의자처럼 앉는 리프트에오르고내리면서도 넘어지고, 스키를 타고 경사길을 내려오다가도 구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깨지며 배우는것이다. 멀쩡한 마른 길 위에서도 넘어지지않나. 의기소침해진 아이가 카페로 돌아와 다시는 스키를 타지않겠노라 선언했다. 개츠비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머리에 눈을 소복하게 인 푸른 나무들만 응시하는데.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마. 넘어진다고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건 아니야. 두 번, 세 번, 열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게 진짜 용기지. 스키 뿐만이 아니야. 토닥토닥토닥. 아이가 일어서며 말했다. 엄마는 계속 앉아 있어. 나 혼자 가볼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은 맞는말이다. 레아마리라는 든든한 친구가 눈 위에서 든든하게 기다려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아이스 스케이팅을 계속해 온 레아마리는 한 마디로 속이 묵직한 친구. 간밤에 만난 레아마리 맘의 독일 친구들도 생기로 넘쳤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 레아마리 맘 역시 건강하고 반듯한사람. 네식구의 삼시 세 끼를 매일 꼬박꼬박 차려내는 사람이라면 두 말이 필요 없다. 독일에 와서 다시 읽는 개츠비는여전히 위대했다. 바래지도변하지도 않는 그의초록빛 꿈때문에. 삶 속에서 만나는 개츠비들또한 위대하다. 건강함과 성실함이라는일상의 이름표를 달고서.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인간들의 설익은 슬픔과 조급한 기고만장에 대해 내가 잠시나마 관심을 잃게 되었던 것은 개츠비를 삼킨 것들, 그리고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부유하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너는 그 빌어먹을 인간들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이야." 그렇게 말했던 것이 지금도 기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내가 그에게 해주었던 유일한 찬사였다. 그는 먼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공모하며 입을 맞춰오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에 모든 걸 이해한다는 찬란한 미소가 퍼졌다. (..) 문득 석 달 전 그의 고풍스러운 저택을 처음 찾아가던 밤이 떠올랐다. (..) 그때 그는 저 계단에 서서 자신의 영원히 더럽혀질 수 없는 꿈을 숨긴 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이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 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기만 하는 황홀한 미래를. (..)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