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에 소나기가 내렸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속에 아침부터 바람의 결이 달랐던 건 기분 탓이었나. 오후의 후텁지근한 공기. 소낙비가 쏟아지자 밀려오던 지열. 1800년대 이후 200년 만의 더위라는 말은 어젯밤 오스카 엄마에게 들었다.
N 엄마의 톡을 받은 건 오후 1시 40분. N 아빠 직장 때문에 캘리포니아로 간 지 3년 만이었다. 미국에 정착하거나 N 아빠의 고향인 프랑스와 인접한 곳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난주에 뮌헨으로 왔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N 아빠가 독일 직장으로 이직을 했다고. 누구라도 나쁘게 헤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어디서든 꼭 다시 만난다.
"혹시 오늘 집에 있나요? N을 서머캠프에서 좀 일찍 픽업해서 놀러 갈까 하는데..."
이런! 이번 주에 한번 오라고 해 놓고도 준비가 너무 안 되어 있으니 마음이 바빴다. 세수도 안 하고, 집 청소도 안 하고, 빨래는 막 널었고, 집에는 과일 하나 없는데. 초대하는 사람의 예의가 아니다.
두 번째 세탁기를 돌려놓고 침대에 기댄 채 글을 쓰고 있던 노트북을 바로 접었다. 머릿속도 빠르게 돌았다. 시간까지 계산해 가면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기 10분, 설거지 10분, 청소 30분, 슈퍼 30분, 빨래 널기 5분, 쓰레기 버리기 5분... 일단 오케이. 다음은 시간.
"언제쯤 도착하나요?"
"한 3시 반쯤? 지금 아파트 근처 쇼핑센터에서 패디 관리받는 중인데, 차로 가면 15분밖에 안 걸리더라고요."
'패디 관리'가 뭐였더라? 아, N 엄마의 귀환!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런 걸 숨기지 않는 게 N 엄마의 매력이다. 현금이 없어 카드로 계산하려니 안 받아 주더라고. 남편이 퇴근할 때 해결해 주기로 했다나.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하며 둘이 하하, 웃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기. 손님이 올 때 재빨리 집 청소와 집 정리를 하는 것은 나만의 노하우다. 두 시간이면 충분. 벼락치기의 진수랄까. 집으로 오겠다는 사람은 무조건 기다려 주는 것도 나이를먹고 생긴 여유다. 사람이 집까지 찾아올 땐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수박을 사 갈까 해서 두말없이 고맙다 했다.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돈이 많다고 인색하지 않은 게 아니다. 세상에는 반대가 훨씬 많다. 서울에서 같이 지낼 땐 내숭을 못 떨고 직선적인 편이라 트러블이 생길 때도 있었다. 내가 N 엄마를 좋아한 건 그럼에도 심플해서였다. 곰도 그렇지만 너무 여우짓도 때론 피곤한 법 아닌가.
옷맵시, 화장, 모발과 피부 등 자기 관리에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것 뿐이었다면 매력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반전이었다. 음식 하며, 집안 정리정돈이며 청소까지 완벽했다. 집안은 엉망이면서 모델처럼 꾸미고 나오는 사람도 많지 않나. N 엄마는 일명 가사 업계의 무림의 고수였다.
미국 생활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다. 이웃도 멀고 슈퍼도 멀어서 늘 차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당연히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국제학교도 한글학교도 새로 온 사람을 잘 끼워주지 않았던 모양. 한국 사람도 많고 한국 레스토랑도 많고 한국 슈퍼도 세 개나 있었지만 맘 맞는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집 키친에서 3시간 동안 논스톱으로 지난 3년이 정리되었다. 지진 때문에 60년대에 나무로 지어진 정원이 있던 집은 외풍이 셌고,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월세는 비쌌고, N이 다니는 미국-독일 인터내셔널 학교의 학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날씨는 또 어떻고.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공기는 피부에 적이었다. 한국은 너무 습하고 뮌헨이 딱 좋다고.
3시간 후 N 엄마가 떠났다. 내가 집 앞 주차 티켓을 3시간짜리로 끊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면 들어갈 새 집에 N 아빠가 먼저 가서 손을 보고 있다며 떠나기 전에 우리 집 앞 이태리 레스토랑 소피아에서 살라미 피자를 사들고 갔다. 피자를 들고 차 문을 열기 전 N 엄마가 말했다. 독일 와서 처음 한국말을 이렇게 많이 했다고. 차에 오르자마자 운전대 옆에 있던 앙증맞은 하늘색 먼지떨이를 한 손에 들고 습관처럼 핸들과 앞쪽 계기판을 총총 털었다.
아이는 9유로 30센트면 사는 피자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자기도 피자가 먹고 싶은지 빨리 집으로 올라가서 우리 동네 슈퍼 에데카 Edeka에서 산 냉동 마가리타 피자를 데워달라고 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스티커 명함을 하나 들고 왔다. 우리도 한번쯤 미리 피자를 주문해놓고 찾으러 내려오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