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시월의 마지막 날에

편지 56

by 뮌헨의 마리


10월이 가고 다시 11월이 왔네요. 시월과는 어제 로젠 가르텐과 이자르 강 앞에서 작별하고 왔습니다. 십일월의 첫날은 흐리고 비. 내년에는 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시월의 마지막 날. 뮌헨의 이자르 강에서 석양을 보았다.



그리운 샘께.

어제는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이렇게 어수선하게 시월을 보낼 줄은 몰랐어요. 아침부터 날씨가 좋아 창문을 모조리 열어두고 맑은 공기를 집 안으로 들였답니다. 화려한 햇살이 동반자인 양 시치미를 떼고 따라 들어오더군요. 모른 척해줬지요. 거실의 라디오 볼륨을 두 개나 올렸어요. 잔칫집처럼 북적여야 집이 잘 된다고 하잖아요. 이 손님들이 제 집처럼 복도와 방들과 부엌을 누비는 것을 손 놓고 구경했지요. 밖은 코로나가 기승인데 날씨는 어쩌자고 그리 좋던지요. 핼러윈이라며 놀러 온 알리시아 친구 율리아나까지 둘을 데리고 이자르 강변 지나 로젠 가르텐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산책 안 가고 집에서 놀겠다는 애들과는 아이스크림과 초밥으로 딜을 했답니다.


록다운을 코 앞에 둔 주말이었어요. 이자르 강변은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지요.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마지막 늦가을의 정취를 보러들 나왔을 거예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으니까요. 하루 종일 화창하고 온화한 날씨였어요. 저는 로젠 가르텐의 장미들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다 스러졌으면 어쩌나, 근심이 한가득이었답니다. 걱정만 하기보다는 직접 가보기로 했지요. 있는 모습 그대로 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강변 공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걸으면 여름 노천 수영장이 나옵니다. 큰 도로를 건너야 해서 아이들과 자전거로 갈 때만 선호하지요. 저는 공원을 지나 이자르 강변로에서 이자르 강을 끼고 걸을 수 있고 나무로 둘러싸인 산책로를 좋아합니다. 떨어진 지 오래인 낙엽들이 갈색 물이 다 빠진 채 수북하게 쌓여 있었어요.


아이들은 언제 안 가겠다 그랬냐는 듯 즐거워했답니다. 둘이라서 더 좋았겠지요. 나무 펜스 위에 올라가 외줄 타듯 걷기도 하고, 낙엽을 발로 쓸기도 하면서요. 로젠 가르텐으로 가는 길에는 매점을 두 군데나 들렀는데 아이스크림이 없었어요. 아직 11월도 아닌데 너무 하대요. 아이들이 매점 앞에 마스크를 쓰고 줄을 서는 동안 저는 다리 위로 올라가 이자르 강 풍경을 폰에 담았어요. 제 사진에 단골로 나오는 이자르 강변 성당 아시죠? 해질 무렵 둘을 잘 구슬러서 반대쪽 다리에서 석양도 찍어야지 다짐을 했답니다. 그런데 애들이 안 따라줬어요. 자기들도 해 지고 할 일이 있다나요. 한 번도 안 해 본 핼러윈 놀이를 둘이서 한대요. 저희 집 이웃과 율리아나 집 이웃들이 목표였답니다. 몇 집에서 사탕이랑 젤리를 얻어와서 엄청 흥분하고 신나 했어요. 저희 바로 옆 사무엘네와 1층에서 제일 많이 주더래요.


이자르 강변의 로젠 가르텐.



샘!

드디어 로젠 가르텐에 도착했습니다. 텅 빈 장미 정원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장미들. 갈색으로 말라버린 장미들. 제가 걱정한 대로였어요. 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 안 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직접 보니까 오히려 담담해지더군요. 아직도 남아 있는 장미들이 대견할 뿐이었지요.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오래 들여다보았답니다. 폰으로도 담고, 눈으로도 담고, 가슴에도 새기면서요. 내년 봄에도 꼭 다시 만나자, 약속은 이루어지겠죠? 고개를 들어보니 사시사철 푸른 나무와, 빨갛고 노랗게 물든 큰 나무와,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뿐인 나무와, 높고 먼 하늘과, 그 하늘에 갈지자로 제 맘대로 붓칠 하는 구름과, 오후 네 시 반 밖에 안 됐는데 절반쯤 생기를 잃어가는 햇살과, 마지막 햇볕을 받아 주황빛으로 빛나는 로젠 가르텐 건물 지붕과, 그 햇살을 마주 보며 앉아 있는 사람들과, 장미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그 모든 것이 하나씩 둘씩 느리게 제 안으로 들어왔어요. 시월과는 그렇게 작별을 했답니다. 뮌헨의 로젠 가르텐에서요.


말씀드렸던가요. 섬머 타임 이후로 뮌헨에는 아침 일곱 시에 해가 뜨고 오후 다섯 시면 해가 집니다. 제가 로젠 가르텐에서 장미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한 블록 더 지나 세번째 산책로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답니다. 로젠 가르텐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벤치가 있어요. 이상하게도 그날은 아무도 안 앉았네요. 더 이상 해가 들지 않기 때문이겠죠. 아이들과 함께 큰 나무가 베일처럼 드리운 그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답니다. 하나도 안 추웠어요. 시간은 오후 4시 45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강변 산책길을 서둘러 돌아와야 했답니다. 로젠 가르텐으로 온 만큼 반대편으로 가야 하거든요. 제가 늘 지나던 다리에 가야만 뮌헨의 석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검은 강, 강물에 비친 노을, 거대한 성당의 실루엣, 성당 뒤편엔 검붉은 하늘이 장막처럼 둘러서야 제대로된 세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자르 강 산책로.



샘.

어제는 새들이 찬조 출연까지 준비하고 있었어요. 흰 철새들이었답니다. 처음 보는 새들의 군무였어요. 라이브로 장장 10분도 넘게요. 남쪽 나라로 대이동을 하기 직전 리허설 같았어요. 낙하는 다리 쪽에서 시작합니다. 강물 위로 아슬아슬하고도 질서 정연하게 몸을 날리죠. 점점이 석양 속으로 사라지나 싶은 순간 강물을 오른쪽으로 가로지릅니다. 성당 앞에서 나선형으로 비상.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며 하강과 상승을 계속하네요. 바람처럼 제 눈 앞을 날을 땐 저절로 탄성이 나왔어요. 저 유연함. 저 결연함. 저 절도와 속도감. 새들의 군무 사이로 강물은 점점 어두워져 갑니다. 강물에 비친 노을과 하늘이 점점 붉어지네요. 새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저한테 들켰거든요.


10월의 마지막 날을 이자르 강 앞에서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어둠이 내려앉는 산책길 대신 주택가 길을 따라 걸었답니다. 그리움은 강물에, 미련은 길 위에 내려놓고요. 그 풍경 앞에 다시 설 날이 올까요. 내년에는 샘을 만날 수 있을까요. 10월이 가고 다시 11월이 왔습니다. 가을이 갔으니 겨울도 오겠지요. 오늘 아침은 흐렸습니다. 해를 보려면 주말까지 기다려야 한대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언젠가 만난다는 보장만 있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요. 노란 낙엽 위를 걷던 날들이 강물 위로 흘러갑니다. 샘과 걷던 가을날도요. 록다운이 버티고 있어 더욱 보내기 싫은 시간도 지나갑니다. 때로는 무심한 시간 만한 위로도 없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이 날이 가야 또 새 날이 올 테니까요. 한국에는 단풍이 절경이겠네요. 다시 뵐 때까지 내내 건강하시기를 빌어요, 샘.



노을 무렵 이자르 강을 수놓은 철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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