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우시절>은 비 온 뒤 대숲처럼 고요하고 정갈했어요. 좋은 때를 알고 내리는 것은 비뿐일까요.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될까요. 먼 훗날에? 아니면 계절이 바뀌면 곧?
영화 <호우시절> (사진:네이버)
그리운 샘.
TV도 넷플릭스도 없는 제게 영화를 보는 유일한 방법은 유튜브입니다. 어제는 유튜브에 영화 두 개를 검색해봤어요. 정우성의 <호우시절(2009)>과 현빈의 <만추(2011)>. 두 영화의 공통점은 여주인공이 중국 여배우이고, 주인공들이 영어로 대화한다는 거죠. <만추>는 못 찾았어요. 유튜브, 카카오페이지, 네이버 영화 앱까지 전방위로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어요. 핸드폰으로 본인 인증이 안 되거나, 해외 서비스 불가라고요. 그래서 영화 <호우시절>만 봤네요. 정우성과 중국의 고원원이 주연, 제목은 두보의 시 첫 구절에서 따왔대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는뜻이라고해요. 영화와 시 구절이 잘 어울린 영화였어요.
정우성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이 기억에 남아요.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낡은 코트 자락 날리며 총 한 자루만 들고 서 있어도 폼이 나는 배우란 걸 그때 알았죠. 무슨 말이 필요 있나요. 차라리 말이 없는 게 더 낫다고 영화를 같이 봤던 친구와 나눈 농담을 지금은 반성합니다. 입을 열어도 멋있으니까요.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걱정도 했는데 다행히둘 다 영어를 무난히 소화하더군요. 배우들이 대사를 버벅거리면 몰입이 안 되잖아요.언젠가 정우성이 자신의 가방끈이 짧다는 셀프 디스를 한 적이 있는데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한 가지 아쉬운 건 무리하게 미국 유학이라는 설정보다는 어학연수가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네요.공원에서 영어 가이드를 하던 여주인공의 직업과도매치가 되고요.
영화를 보며 제가 영국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가 떠올라 자꾸 미소를 지었답니다. 물론 그때는 클레멘스와 연애 중이었으니 달달한 로맨스는 없었어요. 대신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진한 우정을 나누었죠. 제 결혼식에도 와 준 친구들 말이에요. 언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우정을 쌓는 데는 문제가 없더군요. 지금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거나 몇몇은 여전히 싱글로 잘 살고 있겠죠. 제가 집시처럼 떠돌다 보니 연락이 닿는 친구는 많지 않네요. 마음만 먹으면 못 찾지도 않을 텐데 꼭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고요. 친구란 두 종류가 있는 거 같아요. 반드시 함께 시간을 보내야 되는 사람과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람. 저는 어떤 타입인지잘 모르겠어요. 눈 앞에 보이면 다정하고 안 보이면 무정한?
영화 <호우시절> (사진:네이버)
샘.
지난 주말에는 현경이네 집에 놀러 갔답니다. 주말에 애들을 같이 놀게 하자고 약속을 했었거든요. 에너지가 넘치는 현경이와 심심해하는 알리시아의 조합은 의외로 잘 어울린답니다. 토요일 오후에 시어머니 댁에 들렀다가 저녁 무렵 알리시아를 현경이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죠.5시가 넘자 밖이 캄캄해져서 시누이 바바라가 운전을 하고 제가 폰으로 네비를 봐주기로 했어요. 처음엔 알리시아만 내려주고 갈 생각이었죠. 바바라만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바바라가 저녁에 뮌헨 시내에 나간다는 거예요. 시어머니께 뭘 사 오라고 부탁을 받고요. 오예, 그럼 나도 알리시아랑 한국 친구 집에 내려주고 갈래? 뮌헨은 토요일에도 저녁 8시까지 가게들이 문을 열거든요.일요일은 전부 닫고요.
주말 저녁에 갑자기 들러도 되는 친구가 있는게 참 좋았어요. 안 그래도 알리시아랑 같이 오라 했었는데 거절을 했거든요. 바바라를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한국 사람을 만나면 한국말만 하고 싶은데, 독일 사람이옆에 있으면 통역도 해야 하고 대화 거리도 찾아야해서 피곤하거든요.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다가 넷플릭스를 봤어요. 제가 응답하라 시리즈를 못 봤다고 하자 그게 뭐 어렵냐며 당장 거실에 응답하라가 응답하지 뭐예요. 아이들은 현경이 방에서, 어른들은 거실 소파에 앉거나 바닥에 누워 다 같이 <응답하라 1994>를 시청했어요. 현경이 엄마 아빠와 저는 나이 차이가 크게 안 나서 학번도 비슷하죠. 아, 하면 이해하는 사이라고 할까요. 드라마 속의 그 시절을 함께 걸어온 세대니까요.
드라마는 밤새워 돌아가고 현경이 아빠가 먼저 방으로 철수. 현경 맘과 제가 끝까지 드라마를 사수했죠. 아침까지 소파에서 눈 한 번 안 붙인 건 저 혼자였고요. 다음날 볶음밥으로 아침도 먹고, 점심까지 먹고, 오후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왔어요. 현경이 아빠가 차로 데려다주었어요. 한 끼도 보통 일이 아닌데 아무리 친구라도 세 끼를 먹고 오다니요. 고맙고 미안했어요. 드라마를 같이 보는데 현경 맘이 몇 번이나 눈물을 주룩주룩 쏟더군요. 그러자 남편분이 티슈를 가져다주었어요. 어떤 대목인지는 기억이 안 나요. 한국 가족들이 생각나서 그랬을까요. 저는 무덤덤했고요. 드라마나 영화를 같이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겠다, 그런 생각만 했어요.아, 클레멘스는 뭐라고 했냐고요? 웃으며 재밌게 보고 오라, 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뭉쳐 마음만 맞으면 하룻밤 날밤 새는 건 일도 아니란 걸 잘 알거든요.
영화 <호우시절> (사진:네이버)
영화는 비 온 뒤 대숲처럼, 희고 고운 자갈 마당처럼 고요하고 정갈했어요. 주인공들이 호텔까지 직행해도 영화의 이미지가 흐려지진 않더라고요. 젊은 청춘들이니 이해도 되고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여자는 옛 친구인 남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네요. 결단코 밀당은 아니랍니다. 여자에겐 남자에게 다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거든요.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그 사정을 제삼자로부터 듣게 된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다려 줄까요 말까요. 선택은 남자의 몫으로 남기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 속에서는 자주 비가 오다 그치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합니다.두 연인의 마음도 그렇게 젖었다 맑았다 했겠지요. 영화의 제목처럼 좋은 때를 알고 내리는 것은 비뿐일까요.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될까요. 먼 훗날에? 아니면 계절이 바뀌면곧? 봄이 오기 전에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어요.
어제 독일은 록다운 2차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답니다. 저녁이 늦도록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들렸어요.쉬운 미팅은 아니었겠지요. 확진자가현저히 떨어지지 않자 록다운을 12. 20일까지 연장하기로 했대요. 크리스마스 방학도 2주에서 3주로 길어진다고하고요. 연말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겠어요. 이런 영화 같은 비현실 속에서도 매일 반복되는고민은 사소한 것들 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쓸까. 별 일이 있을 리가 없어서 주중에는 종일 집안에만 머뭅니다. 알리시아는 매일 학교에 가고요. 클레멘스는 집과 사무실을 부지런히 오갑니다. 저는 지난 열흘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노래를 듣고,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봤어요. 그래도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없더군요. 좋은 때를 알고 찾아온 게으름과잠시 논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자꾸만 제 자신을 몰아붙이려는 게 문제죠.오랜만에 샘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좋았답니다. 샘께도 마음의 평안이 때맞춰 찾아와 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