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편지 58

by 뮌헨의 마리


저는 꼭 암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반드시 나을 수 있고 꼭 낫겠습니다. 굳은 의지를 가지고 부지런히 걷고 움직일 수 있는 한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암과 함께 살아도 좋습니다. 샘,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한국에서 뵐게요.



맑은 날의 산책길과 흐린 날의 산책로 물웅덩이.



그리운 샘.


이번 주의 시작은 오랜만에 화창한 날이었어요. 1주일인가 열흘만에 해를 보았거든요. 맑고 푸른 하늘도요. 해가 나서인지 날씨도 온화했지요. 일요일 저녁에는 시누이 바바라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네요. 오늘부터 독일은 강화된 록다운으로 가거든요. 1월 중순까지요. 제 수술도 크리스마스 전입니다. 그래서 미리 선물을 들고 왔대요. 가볍고 따뜻한 방수 부츠였어요. 길이가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아 마음에 들었답니다. 바바라가 돌아가고 자초지종을 물으니 클레멘스가 코멘트를 했대요. 지난 주말에 걷기 편한 부츠를 하나 사주겠다 했는데 제가 피곤해서 못 갔거든요. 하루 2번, 총 4시간을 걸으려면 편한 신발이 최고지요. 새 신발을 신고 나간 날에 해가 나왔네요.


저의 하루는 심플합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30분간 따끈한 라디에이터 위에 앉아 금강경 해설*을 읽어요. 서울에서 도반들과 함께 들었던 금강경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벼워지죠. 범소유상/개시허망. 일체 모든 현상들은 그 실체가 본래 없어 허망하다. 그래서 어쩌란 말일까요. 막살아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만 살아도 좋다는 뜻일까요. 그런 뜻은 아니겠지요.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 그것이 거짓임을 분명하게 알면 그 자리에서 부처를 보리. 그때의 부처란 바로 우리 자신을 뜻하겠지요. 오전 산책 때는 암에게도 말을 겁니다. 암아,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 너도 나를 미워하지 말아라. 곧 수술도 받을 거야. 나에게도 너에게도 힘든 시간이 될 거야. 너무 힘들지 않도록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걸을 때처럼 음식을 먹을 때도 암에게 사과를 합니다. 암아 미안하다. 걷기는 내 몸을 데워줄 것이다. 너는 힘들겠지. 암아 미안하다. 나는 이제 과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돌아갈 영양분은 부족하겠지. 네가 좋아하는 흰 밥과 흰 빵과 흰 밀가루와 흰 설탕도 먹지 않는다. 너는 괴롭겠지. 암아 미안하다. 오랫동안 너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 네가 피를 흘리기 전까지.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네 탓이 아니다.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을 풀고 온 곳으로 돌아가다오. 제 자신과 암에게는 자주 금강경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줍니다.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여로역여전/응작여시관. 인연 따라 생멸하는 모든 것은 꿈이요 환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 같다. 이런 이치를 알면 삶이 헛되지 않으리.




알리시아도 오늘부터 이른 방학에 들어갑니다. 애가 학교를 안 가면 아침이 좀 수월하지요. 학교에 가는 날엔 아침 6시 30분부터 아침 식사 준비를 했거든요. 늦게까지 일하는 클레멘스가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아침은 제가 준비합니다. 할 것도 없어요. 플레인 요구르트에 과일 3가지, 오트밀과 견과류를 넣고 먹으면 되니까요. 훌륭한 아침 식사죠. 맛도 있고요. 삶은 달걀도 하나씩 먹습니다. 요즘 저는 하루 종일 대추 생강차를 뜨겁게 마십니다. 환상적인 맛이죠. 커피의 부드러움과 달콤한 크루아상, 안은 부드럽고 겉은 바삭한 흰 빵과 치즈와 햄과 살라미와는 작별을 고했답니다. 투박한 검은 빵과 과일로 알리시아 간식 도시락을 싸면 아침 일과는 끝났어요. 아침 7시 30분에 알리시아는 학교에 고요. 이제는 그런 아침도 한동안 없습니다. 마음이 푸근하네요.


아침에 집안일을 하고, 점심 메뉴도 생각해 둡니다. 아침 산책을 나가기 전에 글도 조금 씁니다. 오전 10시에 산책을 나갑니다. 어떤 시국이 와도 나 홀로 산책과 조깅과 개 산책은 허용될 겁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매일 흐린 풍경만 보다가 맑은 날의 공원은 달라 보였어요. 축축했던 공기도 가슬가슬하고 흙길도 보송보송해졌어요. 땅바닥에는 아직 물웅덩이도 몇 개 남아있네요. 넓은 공원을 걷고 또 걷습니다. 운동장을 돌듯 매일 큰 원을 10번, 작은 원을 5번 도는 것이 목표입니다. 잊지 않도록 손가락을 꼽으며 걷지요. 혼자 걷기에 익숙해지니 혼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한지 모릅니다. 집에 돌아오면 오후 12시. 대추차를 뜨겁게 마시고, 점심을 먹고, 다시 라디에이터 위에 앉습니다. 글을 쓰고 쉽니다. 오후 3시. 다시 산책을 나갈 시간입니다. 오후 5시에 저는 돌아올 겁니다.


처음 두 주 동안은 두 번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엄청 피곤했지요. 문어를 먹고 난 후 피로가 많이 없어졌어요. 걷기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요. 오후 5시면 뮌헨은 캄캄합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이틀에 한번 꼴로 반신욕을 합니다. 라디에이터 위에도 앉고 저녁 8시에 힐더가드 어머니와 통화를 합니다. 언젠가 제가 녹다운이 되어 통화를 못한 적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겠죠. 요즘은 컨디션이 최상이라 늘 힘차게 통화를 합니다. 어머니 걱정하시지 않게요. 어제는 크리스마스라면서 어머니께서 돈을 보내셨나 봐요. 액수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클레멘스가 감사를 드리길래 저도 따라 인사를 드렸답니다. 저녁 9시. 알리시아가 자러 가면 하루의 일과가 끝나지요.(이제는 방학이라 밤 10시로 합의를 보았답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밤이 찾아옵니다. 폰을 끄고 책을 읽지요. 토마스 만의 책은 30분 만에 잠이 오는 효과가 있더군요. 의무를 다하고 난 후의 나른하고 노곤한 밤이 좋습니다. 그 밤의 휴식을 사랑합니다.




샘.

제게 찾아온 암은 자궁 육종암이라는 희귀암입니다. 한국에서도 드문 자궁암으로 전문의도 많지 않습니다. 미국 역시 자궁 육종암의 비율이 전체 자궁암 중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 독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자궁 육종암에 맞는 항암약은 전 세계적으로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한국에서는 자궁 육종암 환자에게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권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안 맞는 약으로 항암을 진행하면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심할 테니까요. 한국은 항암 대신 자궁 육종암 환자들에게 호르몬 치료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저의 독일 병원 의사샘은 일단 수술부터 하고 경과를 보면서 다음 단계를 생각해보자 하셨어요. 하나씩 차근차근 접근하자고요. 클레멘스도 자궁 육종암에 대해 열공 중이에요. 뮌헨 대학병원의 자궁 육종암 연구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있고요.


대략 난감한 암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절망이란 항목은 제 선택지에는 없거든요.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고 대처 방안을 고민합니다. 항암이 안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요. 의사샘도 충분히 고민하고 계실 테니 그분의 의견도 귀 기울여 듣고요. 저로서는 첫 암 선고를 받던 때와 마찬가지로 걷고 또 걸으며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몸의 면역력을 높이고, 체력을 키우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수술 후 최대한 빨리 회복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답니다. 그렇게 일의 순서를 단순하게 정리하면 마음이 차분해지지요.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고, 그런다고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으니까요. 불안은 불안을, 공포는 공포를 몰고 오지요. 이런 건 정신 건강에 해롭습니다. 가장 좋은 건 걸을 때처럼 다음 스텝과 단계에만 집중하는 거지요.


걸으면 걸을수록 더 멀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걷는 자체에 희열도 생깁니다. 암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어도 그 자체로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제게 찾아온 암이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인생을 망치려고 떨어진 폭탄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모든 생활 습관과 마음 습관이 가져온 결과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습관을 통째로 바꾸기로 했답니다. 암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혁명입니다. 저는 이 모든 변화가 신기하고 놀랍고 궁금합니다. 사람이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지 관찰할 생각입니다. 제 자신이 연구 대상이지요. 이런 시기를 클레멘스와 알리시아와 함께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클레멘스는 일과 병행하며 저를 지원하고, 알리시아는 천진난만하게 친구를 초대하고 저녁마다 '응답하라 007'을 보자고 조릅니다. , 저는 꼭 암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반드시 나을 수 있고 꼭 낫겠습니다. 굳은 의지와 함께 부지런히 걷고 움직일 수 있는 한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암과 함께 살아도 좋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한국에서 뵐게요.



흐린 날도 맑은 날도 공원의 나무들은 한결같이 의연하고 아름답다.



*금강경 구절 해석은 각문스님의 <금강 반야 바라밀경>을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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