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도 범이 내려왔다
우리 집의 김나지움 범 학생
지난달에는 자고 일어나면 소나기 지나간 듯 범들이 다녀간 흔적으로 요란했다. 노란 범, 빨간 범, 갈색 범들이 밤새 시끌벅적하게 놀다가 부산스럽게 떠난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아냐고? 저것이 범들이 놀다간 자리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고 일어나면 동네 카페 앞이, 길 모퉁이가, 누군가의 차 지붕이, 벤치 위가 누가 쓸어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노란 색으로 가득했다. 지난 시월의 일이다.
우리 집에는 범 한 마리가 산다. 자기가 토끼인 줄 아는 범이. 김나지움에 입학한 지 두 달만에 집으로 소 친구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토끼처럼 굴던 범은 친구가 오기 전까지 제법 범 행세를 했다.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 달라. 거실을 정리해 달라. 자기 방바닥은 꼭 두 번 닦아 달라. 한 달 전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면 노래를 부르던 친구의 이름은 한나. 엄마는 슬로바키아, 아빠는 독일 사람이었다. 초등 2학년 남동생 파울은 누나들 노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개구쟁이. 친구가 되려고 그랬는지 김나지움에서 우리 동네에 사는 유일한 아이가 한나였다. 초등 때 율리아나처럼.
한국 나이로 11살인 아이는 독일 초등 4학년을 마치고 올 가을에 김나지움 5학년이 되었다. 그 사이 쪽지 시험도 여러 번 보았고, 시월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간고사도 보았다. 시험은 주요 세 과목만 보았다. 수학, 영어, 독일어. 아이는 자신 있는 과목부터 줄을 세우더니 스스로 목표를 정했다. 수학 1, 영어 2, 독일어 3. (점수는 1~6까지, 숫자는 작을수록 좋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독일어가 3-(마이너스)였지만 4가 아니라서 감격한 듯 엄마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엄마는 혼자 미소만 지었다. 아이의 꾸준한 독서를 믿었다.
독일에는 유급 제도가 있다. 초등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갈 때면 반에서 꼭 1명씩 미끄러졌다. 유급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확실한 건 6을 받으면 확률이 높다는 것. 현재 아이 반에도 있다. 쪽지 시험을 포함 영어 시험에서 두 번이나 6을 받은 친구가. 남편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담임이나 교과목 담당 교사가 학습 능력 부족으로 판단하면 유급을 피하기 어렵다. 다행히 그런 불상사 없이 쭉 간다면? 언젠가는 김나지움 졸업반인 13학년이 될 것이고, 졸업시험 아비투어를 보고, 대학에도 가겠지. 그날은 올까. 대체 언제.
아이가 반년 넘게 기다린 시리즈 책은 <마법의 향기 약국>. 다음 편은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최근에 읽고 있는 시리즈는 <마일즈와 나일즈>.
한나가 돌아가자 내 미션도 끝났다. 아이의 요구에 전날은 집 청소, 당일은 아침부터 바빴다. 어른 초대 못지않았다. 저녁에 한나 엄마 카타리나와 남동생 파울이 한나를 데리러 왔다.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해서 집을 보여주고 부엌에서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 덕분에 집이 정돈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대충 해라. 그렇지 않으면 친구 초대가 일이 된다. 아이의 요구를 적당한 선에서 잘랐다. 한나 엄마 카타리나도 편한 타입이었다. 한나는 자기 엄마를 닮은 것 같았다. 아이에게 들은 대로 웃는 상이었다. 밝고 명랑하고 낯을 가리지 않았다. 한나의 웃는 얼굴은 한번 보면 자꾸 보고 싶어 진다고 아이는 말했다. 그런 게 중독이지. 나도 요즘 중독 증세가 있어서 잘 안다.
두 아이는 오후 1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왔다. 금요일 오후엔 급식도 방과 후도 없기 때문이다. 그날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파게티 볼로네제 미트소스를 준비했다. 미리 장을 보고 버섯도 듬뿍 넣어 향과 식감을 더했다. 스파게티 물을 올려놓고 아이들을 기다리며 베란다 너머 이웃들의 뒷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나뭇가지에 남은 잎들은 제 색깔을 잃고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유튜브를 보던 중이었다. 요즘 내가 중독된 리듬과 함께 범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날치 밴드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범 내려온다>.* 요즘 유튜브를 초토화시키는 중인 일명 조선의 힙이자 흥이라 불리는 곡.
아이들이 도착하고, 한나와 인사를 나누고, 무거운 가방을 내려주고, 겉옷을 걸면서도 흥이 멈추지 않더라는 거지. 이것이 한민족의 흥. 발동이 걸리기는 쉬워도 브레이크는 잘 안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마음은 계속 범들과 달리는데 흔들리는 몸으로 스파게티를 온전히 담아내야 한다는. 그게 다 범들 때문이었다. 지난달에는 자고 일어나면 뮌헨에도 범들이 내려온 흔적이 천지였다. 범들이 떼로 내려와 난리를 피우고 부산을 떨다 간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아냐고? 저것이 범들이 놀다간 자리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노란 깃털, 빨간 깃털, 갈색 깃털. 범에게도 날개가 있다면.
11월의 햇살. 아기 범이 똥을 누면 저 돌처럼 호박색이 되지 않을까. 아이가 좋아하는 돌멩이,직접 만든 박스, 그리고 깃털. 범털처럼 가벼운.
아이는 풍물이나 국악이나 판소리를 모른다. 유튜브로 <범 내려온다>을 같이 보는데 반응이 없다. 범이 뭐냐고 물었더니 모른단다. 자기가 범띠인데. 이건 좀 아니지. 저녁에 파파까지 불러 셋이 나란히 누워 유튜브로 BTS 영상을 찾아보았다. 남편은 예의로 봐주는 것 같았다. 와이프의 새 취미인 줄 알고. 그건 아니고. 정색해서 BTS를 찾아본 건 나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근래 폭발적인 K-Pop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K-Pop 하면 BTS 아닌가. 신곡 <다이너마이트>가 나오자 옆에서 아이패드로 딴짓을 하던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엄마, 이거 한국 노래였어? 뭐, 니가 이 노래를 안다고?
아이 말로는 독일 라디오에서 자주 들은 것 같단다. 아이는 책상 앞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공부한다. 주로 힙한 음악채널**을 듣는다. 저녁마다 자러 가기 전에 라디오를 들으며 엄마랑 춤추는 것도 좋아한다. 나는 범 스텝도 한번 밟아보고 싶은데. 만만한 춤이 아니라서 애랑 같이 배우고 싶지만 좀처럼 안 넘어온다. 춤은 그냥 추는 거라나. 아무래도 유튜브를 보며 혼자 열공해야겠다. 범노래를 듣다가 빵 터진 댓글도 소개하고 싶다. 실례가 안 된다면 댓글 쓴 분의 닉네임도 같이. 끊어 읽기를 잘하면 한번 더 빵 터지게 되는. ('춤추는 분들.. 곱게 미친 느낌 너무 좋다. 남에게 피해 안 주게 미친 느낌ㅋ by 불광동물주먹)'*** 나도 저렇게 미쳐보고 싶다. 곱게, 글에만.
범들이 발자국도 안 남기고 사뿐히 넘어왔을 것 같은 빨간 지붕(위), 베란다 너머 이웃 정원의 10월과 11월.
*한국관광공사가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와의 합작으로 만든 해외 홍보 영상 <Feel the Rhythm of Korea>는 최근 유튜브 조회수 3억을 돌파했다.
** 아이가 듣는 채널은 Radio Gong 96.3이다. BTS의 노래였을 수도 있고 비슷한 비트를 아이가 착각했을 수도 있다. 앞으로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디제이가 그룹명과 노래 제목을 소개할 때도 있고, 소개 없이 자막으로 대신할 때도 있기 때문에.
***출처 : <범 내려온다> 유튜브, 온스테이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