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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e Jun 28. 2021

높고 푸르던 달

상동에서 밭멍하기


상동을 다시 찾은 건 그 다음주 월요일이었다. 이전에 청년사업단 줌 미팅에서 뵌 분의 농장을 방문하기로 했기 문이다.


 이미지가 너무 별로였고, 이제 이곳에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또 그 먼 상동을 올라가는 게 내키진 않았다. (읍내에서 40분 정도 걸린다)


다만 초행에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서 아무것도 없는 도로를 쭉 달렸지만, 이번에는 김삿갓면의 예밀포도농장 쪽으로 지나오면 꽤 즐거운 길이 될 거라는 팁을 듣고 그 길로 달렸다.


김삿갓면의 예밀 포도농장은 이미 몇 번 지나가기도 했고 와인족욕센터도 두 차례나 방문한 적이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곳이다. 올라가는 길의 산세가 험하지만, 그만큼 풍경이 좋아서 차를 타고 움직이는 중간중간 멈춰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같은 스팟에서 같은 구도의 사진을 찍었다.



상동에 있는 ‘우아한 농장’은 영월 출신 여성 농업인인 김지현님이 만든 농장이자 체험 공간이다.

요즘 asmr 같은 걸 켜놓고 멍 때리는 게 유행인데 이게 점점 커져 물을 보고 멍 때리는 물멍, 모닥불을 보고 멍하니 있는 불멍을 넘어 초록초록한 밭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밭멍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농장을 가보기 전에 읍내에서도 한 번 뵌 적 있는데, 그때도 직접 담그신 서리태 된장을 나눠주시면서 이 동네가 '서리태'가 유명한 곳이라는 걸 알려주신 이곳 전문가.

직접 담그신 된장과 말린 버섯!


이런 컨셉을 들어본 적은 있는데 밭에서 멍때리기? 조금 생소하고 낯설다. 줌 미팅에서 밭멍이라는 워딩을 처음 듣고 신기해서 이것저것 찾아봤는데 가드닝으로 심리를 치료하거나, 가드닝으로 힐링하는 관련 콘텐츠가 생각보다 많았다.



사실 나처럼 산만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한테 멍때리기는 정말 쥐약, 고문 같은 일이다. 어릴 때부터 “좀 앉아봐” “가만히 좀 있어” “차분히 좀 있어봐” 하는 말을 듣고 살아왔다.


요가 수련을 할 때도 가장 어려운 아사나가 사바아사나나 명상하는 시간일 정도로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괜히 땅 속으로 꺼지는 것 같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친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괜히 머리 만지고 폰이라도 한 번 켜봐야 하고 다이어리라도 끄적여야 하고, 괜히 책은 한 두장 펴봐야 하는 산만한 사람이 바로 나다.


無用의 시간이 멍때리기인건데, 나는 언제나 내 효용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서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 가치까지 부정당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영월 주천면 주천강에서 물멍에 도전했으나 10분만에 산만해졌다.



그래서 1) 밭에서 2) 멍 때리기 3) 상동 이 세 조합은 나에게 멀고 어려운 느낌이었다.


지난번 일을 교훈 삼아 예밀로 넘어가고, 기름은 가득, 거기에 주전부리도 조금 챙겨 입을 채우고 가고 있자니 가는 길도 꽤 즐거웠다. 확실히 영월읍보다는 높아지는 게 느껴져서 좀 더 시원하고 상쾌해진 것 같았다. (처음에 기분이 안 좋고 기름이 없고 배고팠을 때는 이 온도 변화가 서늘하고 오싹했는데, 원효대사 해골물인가. 사람 마음에 따라 인지가 이렇게 달라진다.)



상동 농장은 원래 지현님의 부모님이 농사를 짓던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준 고랭지라 배추농사를 하는데, 지금도 겨울에는 고랭지 절임배추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사용하던 창고에는 절임배추 판매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다. 이전에 상동 폐광 올라갈 때 본 거였는데 이게 그거였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내적 친밀감이 상승한 기분이다.


이곳은 평지보다는 경사도가 있어서 밭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것도 그 부분이라고 하셨다. 비가 오면 밭이 쓸려가지 않게 고랑? 이랑? 을 파고 거기에 맞춰서 땅을 나누고 식물을 배분한다는 것이었다.


해충을 막아준다는 나스타튬


농사라고는 TV 매체를 통해 간접경험만 해본 터라 이런 얘기 하나하나가 생소했다. 농민을 만나본 건 도시 농부 마켓이나 로컬 파머스 마켓 광고판에서 ㅁㅁㅁ농부가 가꾼 채소 이런 광고 문구에서였는데, 실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니 조금 느낌이 달랐다. 땅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과 시간이 필요한지, 단순히 유기농은 그냥 자연 퇴비 주면 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도 작물과 시기를 계획하고 단계별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을 때 어떤 식물이 필요한지, 이런 것들. 전형적인 도시인의 관점으로 이렇게 하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던 게 왜 안 되는 지를 이곳에 오니 왜 실제 구현이 안 되는 지를 볼 수 있었다.


밭 앞을 지나는 자동차 도로를 건너면 또 다른 밭 공간이 나오는데, 이곳은 부모님이 먼저 쓰시던 축사라고 했다. 실제 지현 님의 할머님은 여전히 이곳에서 양봉을 하신다. 이곳에서는 허브를 키우면서 사람들이 실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내가 갔을 때는 시작 단계라 설명해주신 계획의 일부만 볼 수 있었지만, 인스타를 지켜보니 이곳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를 매일매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분 좋게 상동의 초입에서 푸르름을 맛보고 이 기세를 몰아 상동 탄광이 있는 곳으로 다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다신 안 오겠다던 그 다짐은 역시 기분 탓이었던 거 같다.


지현님이 선물해주신 허브3종. 선인장도 죽이는 내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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