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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e May 26. 2021

달에 연착륙

짧지만 강렬한 영월과의 만남

5월 4일.

32세를 2주 남긴 어른은 어린이날 전날이라고 새벽부터 일어나 업무를 처리하고 영월로 향했다.



영월은 막히지 않으면 서울 우리 집에서 대략 2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정체는 대부분 서울 내부에서 생기기 때문에 최대한 밀리지 않게 출퇴근 시간을 살짝 비껴 출발했다. 사전답사라지만, 회사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도 아니니 별다른 계획 없이 아고다 특가로 뜬 영월 읍내에 있는 비즈니스급 호텔(이라지만 모텔에 더 가까운)을 하나 잡고, 영월 신문에서 본 전화번호 몇 개만 적어둔 채로 강원도로 향했다.



연휴 전날과 연휴 다음날 중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빠르게 그리고 5일장에 가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요리를 좋아해서 각종 요리 도구부터 아이허브 컬렉션처럼 보이는 각종 소스와 도구들, 그리고 예쁘게 차리고 먹어야 하니 그릇과 커틀러리도 마음에 드는 건 다 갖추고 있다. 이러다 보니 어딜 가서 뭘 먹더라도 예쁜 게 우선이다.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도 예쁜 주방이 가장 큰 고려사항이고, 보기 좋게 먹을 수 있는 도구들이 갖춰져 있느냐를 살폈다.


원래는 양식파지만,  요즘 로컬푸드 특히 나물에 꽂혀있다. 강원마트에서 킬로씩 사고 후회한 명이나물, 곰취나물, 어수리나물, 두릅을 영월 5일장에서는 더 신선하고 좋은 걸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내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재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컸다.


집을 찾으러 가는 사람이었지만 결국 집보다는 집에서 먹을 걸 더 살폈고, 무슨 나물을 사 올까 하면서 나물을 쌀 면 보자기까지 챙긴 건 비밀이다.



영월에 도착하고 나서 동강 변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오전 업무를 마쳤다. 창가를 마주한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영월에 오면 여기서 일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도시인의 마음의 고향 별다방은 아니지만 시원한 강을 바라보며 일하니 일하는 게 꽤 나쁘지 않았다.



대강 일을 마치고, 다시 읍내로 돌아오기 시작하는데 펜션이 몇 개 보였다. 어릴 때 가족들이랑 휴가 오던 곳도 이런 곳이었는데, 혹시 '가족들이 놀러올 수 있으니' 하며 전화번호를 주섬주섬 적었다. 그게 나중에 나를 구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점심때가 살짝 지나 영월 5일장에 오니 이미 장은 파하는 분위기였다. 많은 점포들이 닫고 있었고 나는 "내 나물"을 외치면서 돌아다녔지만 기대보다는? 작은 나물 셀렉션에 당황하면서 수수부꾸미와 메밀 전병으로 주린 배를 달랬다. 강원도 하면 생각나는 메밀 전병과 메밀전 - 이 지역 사투리로는 부침개가 아니라 부치기라고 한다더라- 중에 고민하다가 메밀 전병을 택하고, 당이 떨어지면 위험사태가 올 것 같아 수수부꾸미도 몇 장 집었다.


이렇게 먹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하면서 입에 몇 조각 넣으니 집 걱정은 사라지고, 뭐 안되면 말지 - 이런 마음으로 끊임없이 먹기 시작했다.


인스타에서 본 이달엔 영월이라는 베이커리에서 빵순이는 빵 하나 물고 남타커를 마시며, 잠시 마음의 고향 합정에 온듯한 마음으로 신나게 티타임을 즐겼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온 전원생활은 사실 읍내 베이커리였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힙스런 사진도 몇 장 담고 인스타 삼매경에 빠졌다.




오후에는 영월군 청년사업단 관계자분을 만나 뵙기로 해서 식사를 마치고 읍내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약간 위워크?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공유 오피스나 청년청, 도시재생 사업? 하는 곳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사무실보다는 조금 캐주얼한 인테리어와 커피 머신 (캬) 인스타로 미리 연락드린 담당자님도 내가 일하면서 혹은 여러 이유로 만나 본 공무원 중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이었다. 통성명부터 왜 여기를 오게 되었는지 여기서 뭘 하고 싶은지 말씀드리고 직접 알아봐 주신 집을 가보기로 했다.



이전 글에도 썼지만, 나는 위치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영월'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영월군 안에는 읍과 면이 있고, 상동읍은 태백, 주천면은 원주랑 더 가까운 느낌이다. 그래서 본인의 상황이나 자가운전 여부, 혹은 어떤 환경을 원하느냐에 따라 읍, 면을 잘 선택해야 한다.


처음 간 곳은 무릉도원면에 있는 연수원의 독채 건물. 무릉도원면이라는 이름답게 가는 길은 구불구불했고, 산이 높이 솟아있었다. 울창한 숲에 흐르는 강까지 정말 무릉도원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구나 했다만.

숙소 위치는 산 중턱이었다. 산속의 숙소라니, 생각하면 아름답고 속세를 떠난 것 같을 수 있겠지만, 나는 속세를 떠나는 휴가가 아니라 한 달 동안 일할 위치를 바꿔 일하는 한 달 생활자라는 점을 감안해서 적합하지 않았다. 주방도 작았고, 장을 보려고 해도 한창을 나가야 하는 곳이니 (택배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가) 패스.


두 번째는 농촌 마을에 있는 펜션이었다. 독채는 아니고 2층 집의 1층을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침구나 주방은 다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도 읍내랑은 꽤 멀었고 다른 일행과 같은 출입문을 사용하는 것도 걸렸고. 집 자체에 문제는 아니었지만 딱 fit 하는 느낌이 없는 곳?이었다.



결국 답사 첫날은 이럴 다할 소득을 얻지 못한 채 호텔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지, 뭐 이러면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마음은 착잡했고, 서울에서도 먹지 않는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노트북을 펼치고 다시 일을 해야 했다. 영월 닭강정 유명한 집이 있다지만, 바쁜 어른은 그냥 배달음식에 와인 이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니터를 보는 와중에도 (어린이날이 다가오는 새벽에도 어른은 일을 한다) 마음 한 켠에는 '영월에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대 여행자는 일박에도 마사지볼, 머슬 페인 밤, 그리고 영양제를 다 챙겨가고 과일에 와인도 바리바리.


올타임 베스트 페리카나 양념에 우연히 딴 소비뇽 블랑이(프롬 코스트코) 맛있어서 걱정은 됐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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