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세계 3위의 파워입니다만

국경의 의미

by 노마드마리

대한민국 여권으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아시나요?




한 국가의 여권으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를 세어 보는 여권 지수라는 것이 해마다 발표되는데, 2021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여권 소지자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는 189개국. UN에서 인정한 전 세계 나라 수가 195개국인 것은 감안하면,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면 전 세계 '프리패스'와 거의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그 여권 파워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축복받은 일이지만, 그래서인지 무비자 입국이 불가능하게 된 이 상황이 더 큰 일로 느껴졌다.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바로 도쿄에서 출발해 도착한 발리로의 입국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2020년 3월 당시에는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때이기에 간단한 체온 측정과 발리에서의 거주지를 확인하는 절차만 거치면 관광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 도착비자도 바로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한국에서 대구발 대유행이 발생하고 있던 상황이라 한국에서 출국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출국했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조금 식은땀을 흘렸다.


문제는 2020년 12월, 한국에서 에스토니아로 입국할 때였다.

몇 개월 사이 상황은 많이 변화해 있었다. 봄에 대유행으로 코로나 방역에 뼈아픈 경험을 한 한국은 이제 'K-방역'이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박수받는 방역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코로나 확진세도 많이 누그러진 편이었다. 그래서 조금씩 한국인의 입국을 허용하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들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 수가 증가 추세였고, 많은 나라에서 락다운을 실행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더라도 집 안에서만 지내게 될 판이었다.

비교적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던 에스토니아는 무비자 입국을 허락했지만 한국에서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이나 핀란드를 경유해야 했고, 경유 입국 시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EU 국가의 입국 심사는 첫 도착국에서 이루어진다.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받게 된 입국 심사.

기본적으로 입국 심사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다소 긴장된 상황에서 이뤄지지만 이 날은 특히 더 조마조마했다. 독일, 에스토니아의 국경 경찰과 외무부 등에서 문제없다는 이메일은 미리 받아 두었지만, 입국 심사에 통과할지는 늘 입국 심사관의 손에 달린 문제.


"에스토니아에서 3개월 동안 머물 것이고, 그동안 디지털 노매드 비자 취득을 위한 준비와 리서치를 할 예정이야."


내 말을 들은 입국 심사관은 옆 입국 심사관과 심각하게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여행 주의 권고가 내려진 것은 알고 있니?"

"그 비자의 취득은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거니?"

"3개월 안에 꼭 EU를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니?"

"어디서 머물 거야?"

"에스토니아는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니?"

등등 나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내가 받은 입국 심사 중에 2번 째로 시간도 오래 걸리고 질문도 많이 받은 입국심사였다.


독일과 에스토니아의 정부 부처, 대한민국 영사관 등과 미리 연락을 취했기에 많은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 '혹시나 입국 거부를 당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도 조금은 머릿속 한 구석을 맴돌고 있었다.


프랑크프루트 공항 입국 심사관이 내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던 순간의 안도감과 도장 찍는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름 세계 3위로 강력한 여권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이렇게 가슴을 졸여야 하냐고.




어떤 나라를 여행하건 비자나 입국 심사에 대해 특별하게 신경 써 본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 일은 계기로 '내가 정말 국경을 넘고 있구나.'라는 것을 실감을 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 다른 나라에 입국하는 것, 입국할 수 있는 나라를 선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마치 대단한 일처럼 느껴졌다.

대한민국 여권을 롯데월드의 자유이용권처럼 생각하고, 티켓만 있으면 모든 놀이기구를 당연히 다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프랑크프루트를 경유할 때에도 경유 시간이 꽤 길어 시내 구경을 하려고 도착 로비를 빠져나갔는데, '혹시 다시 못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독일에서 받은 PCR검사지를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등등 다시 공항으로 들어올 때까지 조금은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시내로 나가기 전, 항공사 직원이 문제없다고 확인해준 덕분에 살짝 안심하고 있긴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온라인 상의 교류는 활발해질 수 있었지만, 물리적 장벽은 여전히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백신 여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항공사들은 착륙하지 않고 하늘만 나는 비행 상품을 내놓고 있으며 랜선 투어와 같은 여행 상품도 등장하고 있다.


우리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에 발을 내딛는 일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너무나 쉽게 여러 나라를 방문할 수 있었던 우리의 이동의 자유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는 그 어디 즈음 우리에게 물리적 '여행'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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