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새해를 맞이하다
한국에서 양력 1월 1일인 새해 첫날뿐 아니라 음력 1월 1일인 설날도 명절로 쇠는 것처럼 발리에서도 발리 힌두교만의 사카력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사카력으로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보낸다.
녜피(Nyepi).
뜻은 침묵. 발리 사람들은 새해 첫날을 조용히 경건하게 보내기 때문이다.
7~8월의 한여름이 보통 발리의 성수기라 양력으로 3월 즈음에 찾아오는 녜피를 관광객들은 보통 잘 경험하게 될 일이 없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녜피에 맞춰 발리를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녜피는 발리의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고, 발리 힌두교의 문화를 섬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3월 초, 들뜬 마음으로 발리에 입국한 나는 일주일 즈음 지나고 나서야 발리의 새해가 3월 말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카운트다운도 하고 신나게 축제 분위기로 보내는가?' 궁금해진 나는 발리의 새해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녜피 날은 집 밖으로의 이동이 금지되고 전기 사용도 금지되며, 심지어 요리를 하거나 음악을 트는 것, 먹는 것과 말하는 것까지 자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새해 첫날의 해가 뜰 때부터 다음 날의 해가 뜰 때까지 집에서 자신의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는 것에만 충실하는 날. 발리 사람들의 새해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하루로 시작된다.
나처럼 도저히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발리의 무수히 많은 호텔에서 녜피 패키지를 제공하고 있으니 호텔에서 머물 수도 있다. 비록 호텔 밖에 나오는 것을 허락되지 않더라도 호텔 안에서 2박 3일을 전기나 음식 걱정 없이 평소대로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새해 전 날 오후부터 새해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였다. 새해 첫날 하루 동안 필요한 물품들을 사거나 마을의 큰 사원에 평소보다 훨씬 화려한 장식품과 제물을 바친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평소에는 밤늦게까지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조용한 발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20년 발리의 새해는 3월 25일이었다. 24일 저녁부터 호텔에 머무르기 시작한 나는 25일 아침, 새소리와 가끔 들리는 닭, 소, 개의 울음소리로 아침을 맞이했다.
하루 종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흔한 오토바이나 차 소리도 사람들의 목소리와 음악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하루였다.
'발리 사람들은 지금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그날 밤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호텔 직원들이 방으로 찾아와 방 안에서 불을 켜도 괜찮지만 방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가서는 안된다며 암막커튼을 몇 번이고 체크했다. 호텔 건물 밖에서는 객실이 훤히 보이는 야외 주차장에서 직원들이 객실 하나하나의 불빛을 체크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 새벽 한 두시쯤 되었을까 직원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어, 방의 불빛을 다 끄고 암막 커튼을 걷고는 발코니로 나갔다.
발리섬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고, 땅인지 하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곳에 수많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정말 촘촘히 박혀 있어 플라네타륨을 능가하는 우주의 모든 별들을 까만 천막에 다 모아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진으로는 차마 담을 수 없었지만 내 두 눈에 몇 시간이고 담아둔 그날 밤의 하늘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발리 사람들은 왜 이렇게 철저하게 새해 관습을 지키고 있을까?'
발리 사람들이 밤에도 불빛 하나 없이 집 안에서 조용하게 새해 첫 날을 보내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작년의 묵은 귀신들이 새해가 되어 저승으로 갈 때 혹시라도 불빛 때문에 눈에 띄게 되면 저승으로 같이 데려간다는 옛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리 사람들은 새해 전 날 각 마을에서 다양한 모양의 귀신 모형을 들고 퍼레이드를 한 후 저승으로 잘 가라는 의미로 불에 태워준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아쉽게도 올해는 이 퍼레이드가 없었지만, 각 마을에서 제작한 다양한 모양의 귀신 모형을 마을 회관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발리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발리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리와 발리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녜피 날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 이 날은 발리 공항도 문을 닫기 때문에 녜피 날 밤 발리 상공을 날고 있다면 발리섬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발리에서 가장 자연에 가깝고 문명으로부터 멀어진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요?"
발리는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하기에 지인이 내가 발리에 있다니 물어본 질문이다.
하지만 발리는 관광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평소 발리의 해변을 찾는다면 자연 구경보다는 사람 구경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우붓의 논과 정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녜피 날만은 발리의 자연을 가장 본연의 모습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날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해변과 논과 정글에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창 밖을 통해 느끼는 고요한 공기와 보이는 자연 풍경은 평소 느끼고 보는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인류가 지구에서 멸망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녜피 날, 호텔 방에서 발리섬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자연은 인간이 없어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인간은 자연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을까?
환경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요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해하지 말고, 단 한 번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지구를 바라볼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