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의 이유
여러분의 첫 여행지는 어디였나요?
저마다의 첫 여행지는 아마 각자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처음'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의 첫 여행지는 런던이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간 첫 해외 여행지.
내 첫 여행지의 이유는 '영국 영어가 좋아서'였다.
내 영어 공부의 박차를 가해주던 것이 바로 영국 배우들의 독특한 영어 발음이었는데, 영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영어에는 영국 사람이 하는 발음과 미국 사람이 하는 발음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절제되고 조금은 알아듣기 힘든 그 영국 영어 발음을 나는 꼭 현지에 가서 들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영국 런던으로 향했고, 정말 알아듣기 힘들어서 특히 펍에서는 주문에 꽤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점차 여행을 거듭해 가면서 당연히 매 여행마다 그 행선지를 고르는 이유는 존재했지만, 오히려 조금 더 불분명해지고는 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기 1년 전인 2019년에 간 여행지의 이유는 특히 더 명확하지 않았다.
3월에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심정으로 회사 동기들과 함께 전혀 관심도 없던 홍콩으로
4월에는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태국으로
6월에는 이미 가 본 적 있는 이탈리아를 똑같은 코스로 방문했고
7월에는 혼자 쉰다는 명목으로 발리로
연말에는 기네스 맥주를 마시러 아일랜드와 지인의 추천을 받은 포르투갈로 연말 여행을 떠났다.
일관성도 없을뿐더러 '이것만은 꼭 해야지'라는 마음 따윈 없는 선택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이 있다.
첫 런던 여행을 계기로 나는 영국 영어를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 줄였다. 좋아하던 영국 영어를 직접 들을 수 있어 기뻤지만, 의사소통의 수단인 영어로 도무지 대화하기 힘든 상황이 씁쓸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무엇인가의 이면을 보게 되면 우리는 기대한 것만큼의 실망감을 가슴속에 품게 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거듭되는 여행 속에서 '기대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 없이 여행지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홍콩의 민주화 사건 이전에 홍콩에 다녀왔기에 자유로운 홍콩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발리에 다녀왔기에 발리가 외국인들이 지내기에 친화적인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기대하지 않았던 포르투갈에서 맛있는 에그타르트와 아름다운 동루이스 다리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기대하며 '이것만은 꼭 해야지'라는 리스트를 깨부수는 여행이 아닌
'내가 무엇인가 느끼고 배우고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여행인가'에 대해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여행을 바라보게 되었다.
2019년 여름에 다녀온 발리는 서양인들이 많이 사는 동남아 국가의 느낌이었고, 아름다운 해변과 정글이 나를 사로잡았다. 2018년부터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시작한 요가로도 유명한 섬이기도 했다. 자연에 둘러싸여 쉬고 싶었지만, 관광객들 또한 굉장히 많은 섬이었다.
2020년 이른 봄에 코로나 팬데믹의 전초 증상이 보이고 있을 때 즈음, 도쿄 올림픽 관련 일을 하고 있었던 나의 일자리는 이미 불안해졌고 일본을 떠나는 선택지를 고른 나는 '어느 곳으로 떠날까?'라는 질문 앞에 발리를 불현듯 떠올렸다.
나에게 '쉼'을 제공해주었던 곳.
여러 외국인들도 살고 있으니 적응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지의 이유는 생각보다 이렇게 단순할 수 있다.
기대하지 않고, 내가 여행지에서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경험에 좀 더 집중할 것.
일본 생활의 2막을 정리하고 쉬어 가는 의미로 선택한 발리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6개월 간의 긴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관광객이 없는 발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발리에서 특별히 깨부수고 싶은 리스트가 없었기에 나는 더 크고 값진 것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