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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지 Dec 03. 2020

800일에 이별을 선물 받았다.

타임 루프


군대에 남자친구를 보낸 사람들 중 꽃신을 신을 확률은 통상 15% 미만이라고 한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그 힘들다는 일말상초도 넘기고, 매달 한 번씩 꼬박꼬박 면회를 가며 슬로모션을 걸어놓은 것 같던 1년 9개월을 끈질기게 인내한 끝에 그의 전역을 함께 축하하며 기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귄 지 800일이자 전역 한 달째 되던 날, 빼빼로 한 통을 사들고 우리 집에 온 그는 꽃신 대신 이별을 불쑥 내밀었다.


그만하자.


내가 방금 들은 말이 뭔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800일, 그 무수한 시간들을 단 2초 만에 끝내 버리다니. 헤어질 일도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대화를 나누던 중 작은 의견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이별은 입영통지서처럼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꽃신을 신은 15%의 뒷이야기가 있다. 남자친구의 제대를 기다린 15%의 커플 중, 2/3는 남자가 제대 후 변심해서 헤어지고 결국 군대를 보낸 100쌍의 커플 중 5%만 관계를 지속해간다고 한다.


"나 안 사랑해..?"

"응, 안 사랑해."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둘 곳이 없어 우리 집 베란다에 놔뒀던 군화를 그의 가슴팍에 밀치듯 떠넘겼다. 그는 말없이 군화를 들고 나갔다.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 날밤을 꼬박 지새웠다. 동이 터올 무렵, 좀비처럼 비척비척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편지를 버리는 일이었다. 21개월 동안 주고받았던 족히 이백 통은 넘을 편지들. 클리어 파일에 끼워서 앨범처럼 간직하고 있던 그 편지들. 책으로 만들기로 약속했던 그 편지들을 박스에 담았다. 주차장 옆 재활용품 분리수거장에 박스를 내던지면서 죄를 짓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나 다시 돌아와 버려진 편지를 보고 진짜 끝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가 박스를 챙겨가진 않았을까, 오만 생각이 들었고 결국 다시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다. 박스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정말 끝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엉엉 울었고, 딸이 걱정된 엄마는 급히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올라왔다. 죽을 시켜놓고도 나는 한 술도 못 뜬 채 굵은 눈물만 떨궜다. 그리고 우리 집에 남아 있던 그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가 놓고 간 휴가용 배낭에 하나씩 하나씩 그의 소지품을 담았다. 뭘 넣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배낭은 꽉 찼다. 마지막으로 빼빼로데이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미처 전하지 못한 핸드크림을 배낭 앞주머니에 넣었다. 다가오는 겨울, 그가 알바할 때 손이 틀까 봐 준비했던 것이었다. 그를 위한 것이었기에 차마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만나서 얘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기대를 품고 문자를 보냈다.


   -니 물건 가져가.

   -문 앞에 놔둬. 내일 오전에 가져갈게.


내가 출근했을 때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행간의 메시지를 읽자 실낱처럼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마저 끊어졌다. 그가 나에게 마지막을 고했던 공간에 혼자 있기란 불가능했다. 엄마가 부산으로 돌아간 뒤 나는 직장 근처에 사는 친한 언니 집으로 향했다. 언니는 흔쾌히 나를 재워주었다.


"힘들수록 든든하게 챙겨 먹어야 돼. 그딴 놈은 잊어버려."


언니는 매일 아침을 차려주었다.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토마토 파스타도 만들어 주고 모닝 삼겹살도 구워 주었다. 덕분에 '사랑이 떠나가도 밥만 잘 먹더라'라는 노래 가사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언니 집에서 잘 얻어먹으며 일주일 동안 회복의 시간을 가진 뒤, 나는 다시 헤어진 장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기억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어 일부러 약속을 많이 잡았지만 매일 밤 그와의 추억 속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집 앞 골목길을 걸어올 때 그를 밀어내려는 마음은 왼쪽 발목에, 그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오른쪽 발목에 매달려 나를 붙잡았다.


    '늘 만나던 골목길 전봇대 옆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아무도 없는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지는 않을까?'



침대에 누우면 마치 복도 한가운데 누워 있는 것처럼 복도와 계단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지금 계단 올라오는 발소리가 그 사람이진 않을까?'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우리 집 앞에서 멈추진 않을까?'


그러나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매번 실망에 그쳤다. 자기 전에 그의 카톡 프로필을 확인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멀리 밀어두었지만 사실 핸드폰 화면을 눈 앞에 바짝 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 온 신경은 핸드폰을 향해 있었다. 진동 소리에 놀라 황급히 핸드폰을 들춰보면 아무 알림도 떠 있지 않기 일쑤였다. 결국 핸드폰을 끄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내 몸은 여전히 이별의 늪 한가운데 빠져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던 장면이 마치 무한 반복되는 비디오처럼 계속 되감기 돼서 틀어지는 것 같았다. 실연당한 장소에서 매일 눈을 뜨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었다.


세상의 시간은 태연히 흘러갔지만

가로수의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고 첫눈이 올 때까지

나의 시계는 여전히 고장 난 채 그와 헤어진 시간에 멈춰 있었다.



타임루프


22시 35분

전봇대 뒤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림자


22시 37분

현관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한 남자


23시 21분

선명하게 들리는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


00시 12분

웅웅 대며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


07시 20분

메마른 눈을 뜨면

차갑게 밀려오는 텅 빈 공기


08시 28분

대문을 힘겹게 밀어젖히고

씁쓸한 미련도 밀어젖히고


11월 05일

고장 난 태엽을 되감으며

멈춰버린 하루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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