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행 기차
안 신을 수 있다면 안 신는 게 좋은 신발. 어쩔 수 없이 신게 된다면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신어야 한다는 그 신발.
고무신
많고 많은 신발 종류 중에 왜 하필 고무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괜히 촌스런 이름 탓을 해보지만 무슨 이름이 붙든 남자친구가 군대에 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나라를 지키러 갔지만, 정작 나는 나라를 잃은 것만 같았던 5주 간의 훈련소 기간. 평소엔 스팸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지역번호를 애타게 기다렸다. 사격 훈련에서 혹시 만발을 쏴서 걸려 올지도 모르는 짧은 1~2분간의 포상 전화를 놓칠까 봐 핸드폰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훈련소 홈페이지에 단체사진이 올라오면 다 똑같아 보이는 군인들 중 남자친구를 발견하려고 '월리를 찾아라'를 하듯 두 눈을 부릅뜨고 샅샅이 살폈다. 인터넷 편지를 쓰면서 혹시라도 군번을 잘못 적어 전달이 안 되진 않았을까 조마조마했고, 매일 답장을 기다리면서 우체부 아저씨가 다른 집에 편지를 잘못 두진 않았나 우편물 반송함까지 뒤적거렸다. 또 평소엔 모르고 지나쳤을 빨간 우체통이 이렇게 눈에 잘 띌 수가 없었다.
자대 배치는 어디로 받을지, 혹시 너무 먼 곳이나 자주 휴가를 나오지 못하는 전방은 아닐지 함께 조마조마했다. 기념일에 선물을 보낼 땐 괜히 선임들에게 밉보일까 봐 다른 선임들 것까지 일일이 라벨지를 붙여 개별포장을 한 뒤 택배박스에 넣었다. 마치 자식 뒷바라지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저녁 6시부터 8시 30분 사이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요즘처럼 장병들에게 개인용 핸드폰이 보급되기 전, 군인들은 공중전화에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콜렉트콜로 전화하곤 했었다. 군대에서 언제 전화가 걸려 올지 몰라 친구를 만나거나 회식을 가도 늘 핸드폰을 테이블 옆에 올려놓고 밥을 먹었다. 친구와 얘기 도중 전화를 받을 때면 친구에게 미안했고, 회식 자리에선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30분 넘게 들어오지 않아 눈치 보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24시간 중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고 지금 하지 못하면 내일 이 시간까지 또 기다려야 했다. 뒷사람 눈치가 보여 너무 길지 않은 전화가 끝나면 남자친구는 싸지방으로 달려갔고, 30분 동안 페이스북 메신저로 못다 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면회 가기 일주일 전부터 매일 마스크팩도 하고,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겹치지 않는 옷을 전날 밤 잘 다려두었다. 부대로 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시골 풍경들은 낯설었지만, 남자친구도 나와 같은 풍경을 보며 부대로 들어갔겠지-란 생각을 하면 금세 친근해졌다.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는 검문소는 무섭기보다 설레는 곳이었다. 군인 아저씨들은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닌 내 남자친구의 선임, 동기, 후임이었고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자친구였다. 면회 신청서를 쓰고 생활관에 방송이 나가는 것을 들으며 남자친구가 오길 기다리는 그 10여분 동안, 거울을 몇 번씩이나 보면서 화장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주위엔 다른 부모님, 여자친구들이 함께 목을 빼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군인은 아니었지만 동지애를 느꼈다.
면회가 가능한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꽉꽉 채워서 함께 있었지만 언제나 아쉬웠고, 혼자서 돌아오는 어둠이 내린 길은 항상 허탈했다. 남의 군대는 빠르다고, 입대 고별 방송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연예인들은 벌써 방송에 복귀한다는데 내 남자친구의 군대만 누가 자꾸 시간을 느리게 조종하는 것 같았다.
휴가는 하루가 1분 1초처럼 느껴졌다. 군대를 가지 않았다면 일상이었을, 함께 밖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들이 소중했고 감사했다.
그렇지만 복귀 시간이 다가올수록 침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터미널에 바래다주고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에 손을 꼭 잡고 행복하게 걸어가는 다른 커플들을 보면 시린 것은 손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자기 전에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소리 없이 베개를 눈물로 적시곤 했다.
고무신을 신었지만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군대를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우린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그건 수많은 사랑의 형태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신발에도 꽃말처럼 의미가 있다면
고무신의 뜻은 애틋한 사랑이 아닐까.
춘천행 기차
서늘하고 쌉쌀한
아침 내음 속
주머니에 고이 넣은
빳빳한 설렘 한 장
창문에 맺혀있는
저 빗물들은
견우의 눈물일까
직녀의 눈물일까
새하얀 추억들을
뭉실 피우며
그리움의 속도로
너에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