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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지 Dec 10. 2020

이별보다 힘든 건 너와의 추억을 버리는 일

지갑 정리

시험 기간, 전공 책 몇 권이 든 가방을 들고 가는데 어깨가 무척 결리고 아팠다. 평소엔 잘 못 느꼈는데 안 그래도 예민한 시험 기간에 어깨까지 무거우니 괜히 더 짜증 나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묵직한 가방을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꼭 보지도 않던 뉴스는 시험 기간만 되면 재밌어지고, 책상 정리도 시험 기간에야 비로소 할 시간이 난다. 이 날도 어김없이 시험 기간의 법칙이 발동됐고, 나는 가방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가방 자체는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져 있는데..'


가방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책상에 늘어놓았다. 다이어리, 이어폰, 팩트, 립밤, 지갑, 인공눈물, 껌, 필통, 정리노트, 전공책 등등.. 헤르미온느의 마법의 가방처럼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깨에 빈 가방을 메고 꼭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을 다시 하나씩 집어넣었다. 그런데 지갑을 넣는 순간 가방이 묵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매일 내 승모근을 짓누른 주범을 알게 되자 괘씸해서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매일 쓰는 체크카드와 현금 이외에, 지갑에 한 번 들어간 것들은 웬만해선 잘 나오려 하지 않는다. 노트 정리든, 책상 정리든, 모든 정리의 역사는 원래 시험 기간에 이루어지는 법. 나는 주저 없이 지갑 정리에 돌입했다.


가장 많은 것들은 역시 고속버스 티켓. 주말이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장거리 연애를 했었던 터라 고속버스 티켓들이 한 무더기 나왔다. 덕분에 그 복잡한 고속버스터미널을 훤히 꿰뚫고 있었는데.


다음은 '아, 이런 영화도 봤었지'-란 기억이 그제야 나는 영화 티켓. 지금은 영수증으로 대체됐지만 학창 시절에는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결말이 어땠는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영화. 너무 길어서 보다가 중간에 나왔었지.

남산타워에 처음 올라갈 때 사용했던 케이블카 티켓도 나왔다. 남산타워에 처음 올라가서 서울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비로소 서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한도전에 자주 나오던 팔각정, 잔뜩 걸린 자물쇠를 구경하면서 신기해했었지.


오래돼서 잉크가 휘발되어 가는 영수증.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리고기 집의 영수증이었다. 유명한 집은 아니었지만, 길 가다 냄새에 이끌려 들어간 집이었다. 부추와 함께 볶아진 양념 오리고기도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별미는 철판에 볶아주는 치즈 볶음밥이었는데. 쫙쫙 늘어나던 치즈를 생각하니 입안에 군침이 맴돌았다.


카페의 쿠폰들도 여러 장 나왔다.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나버렸거나, 너무 멀어서 언제 갈 수 있으려나 싶은 곳들. 또는 참 좋았지만 다시는 갈 일이 없어진 다른 지역의 카페 쿠폰들.


무거운 지갑 속에서 쏟아져 나온 건 마음 한켠에 묵혀뒀던 너와의 추억들이었다.


한때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지만, 어느새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나를 보고 깨달았다.

이젠 정말 너를 보내줄 때가 된 것 같아.  


지갑을 비우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올 공간이 생겼다.

내일은 어깨를 짓눌리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겠지.

지갑 정리가 끝났다.


지갑 정리


지갑이 너무 무거워

지갑 정리를 했다


내용도 가물가물한 영화표

고속버스 시간표와 탑승권

구멍 뚫린 케이블카 입장권

잉크가 다 날아간 영수증

이젠 갈 일이 없어진 카페의 쿠폰


필요 없는 걸 휴지통에 버리니

새로운 걸 넣을 자리가 생겼다


지갑 정리가 끝났다

지갑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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