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ny Side Up
입이 열려야 마음이 열린다는 말이 있다. 부엌은 사람들의 입을 열어줌으로써 마음을 열게 만드는 공간이다. 각자의 삶을 살고 온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자연스레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며 같은 음식을 공유하는 곳. 이곳처럼 자연스럽게 정이 싹트고 사랑이 깊어지는 공간이 있을까. 하지만 자취생에겐 아직은 조금 먼 이야기이다.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나만의 부엌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에 이것저것 요리를 시도해보았다. 배추 3포기를 사서 생애 첫 김장을 했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김치를 사 먹는 것보다 재료값이 더 나가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 됐지만 말이다. 또 닭볶음탕을 하려고 했는데 백숙용 닭을 주문하는 바람에 <줄리 앤 줄리아>란 영화에서 오리뼈를 바르는 줄리처럼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생닭을 조각조각 분해도 해보았다.
그런데 요리를 하면 재미는 있지만 문제점이 있었다. 요리 하나를 할 때 필요한 재료는 당근 1/3개, 양파 반 개이지만 이를 위해서 당근 한 봉지와 양파 한 망을 사야 한다. 자취생에게 이런 재료를 유통기한 전에 다 쓰기란 어려운 일이기에 매번 음식물 쓰레기가 요리보다 더 많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점점 요리시간은 짧게, 음식물 쓰레기는 최소한으로, 유통기한 안에 다 먹을 수 있는 요리 재료에 정착하게 됐는데, 그것은 바로 계란이다.
계란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내 근육량을 표준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 아주 우수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 엄마가 하루에 한 끼는 계란을 반찬으로 해주셨다. 간장 한 숟갈에 참기름을 살짝 둘러 야무지게 비벼먹는 계란밥은 언제나 맛있었다. 간장이 식상하다고 여겨지면 케첩을 넣어서 짭짤한 케첩 계란밥을 해 먹었다.
계란으로 할 수 있는 자취 요리는 무궁무진하다. 짜파게티에 계란을 넣어서 올리브 오일을 살짝 두르고 한 번 더 볶아 먹으면 계란이 묻은 짜파게티 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돼지고기 듬뿍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카레에도 계란 프라이가 빠질 수 없지. 계란 프라이를 카레에 잘 섞은 뒤 아삭한 김치와 함께 먹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스팸, 양파, 당근을 잘게 다진 뒤 찰랑거리는 계란물에 몽땅 투하하고 도톰하게 말아 올린 계란말이는 언제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내 시그니처 메뉴다. 모차렐라 치즈를 속에 넣으면 더 고급지지만, 없어도 없는 대로 담백하니 좋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귀찮은 날이라면 제일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반숙 계란 프라이-sunny side up-를 먹는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언제 먹어도 맛있으며 조리시간부터 뒤처리까지 모든 게 만족스럽다.
냉장고에서 계란 한 알만 달랑 꺼내기엔 뭔가 좀 아쉽다. 기분이 안 좋은 날은 좋아지라고 두 개씩, 기분이 좋은 날은 좋으니까 두 개씩. 냉동실에 쟁여둔 깍두기 볶음밥도 예쁜 그릇에 옮겨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려놓는다. 적당히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 바퀴 두른 후 톡-하고 계란을 깬다. 밑부분이 치이익하고 익으면 잘 달궈졌다는 신호다. 투명한 흰자가 어느 정도 하얗게 다 바뀌었으면 오스트리아의 소금광산에서 공수해온 미네랄 소금을 조금 친 후 3, 2, 1 하고 바로 불을 끈다. 자체의 열기만으로도 조금 더 익을 것이므로 잠깐 내버려 둔다. 때 맞춰 경쾌하게 땡!-하고 소리 난 전자레인지에서 뜨거운 그릇을 조심히 꺼내 테이블에 세팅하면 준비 완료!
올리브유를 머금어 윤기 나는 흰자 위에 촉촉하고 샛노란 노른자가 둥글게 웃고 있는 걸 보면 하루의 고단함이나 외로움 따위는 잠시 잊게 된다. 따끈따끈한 밥 위에 그대로 올려 숟가락으로 가운데를 톡 터뜨리면 노란 물결이 밥알 위로 햇살처럼 쏟아져내린다. 나영석 PD가 만든 요리 프로그램은 여기에 찰떡궁합. TV를 보며 한 숟갈 크게 퍼서 먹으면 소소한 행복감과 만족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그래 이거지, 인생 뭐 있어?
세상이 당신을 힘들게 할지라도,
때론 조금 외로울지라도
언제나 밝고 명랑한 면이 있기 마련이니까
sunny side up.
오늘 저녁도 sunny sid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