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츠와나의 추억 vol.40
오카방고 델타, 쵸베 국립공원, 칼라하리 사막, 다이아몬드 하면 떠오르는 나라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인 나라로 손꼽히는 곳이자, 동물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자연보호구역에 코끼리, 치타, 코뿔소, 표범, 하이에나, 기린, 하마, 얼룩말, 임팔라 등 놀랄 만큼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보츠와나는 지난 2014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가 세계 112개국의 경제 성장률·부패 등 요소를 분석해 산출한 투자 적합도 지수(Baseline Profitability Index)에서 1위에 오를 정도로 안정적인 나라로, 여행하기에 부담이 없다.
1966년 독립한 보츠와나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이 인종차별이나 종족 갈등에 몸살을 앓는 동안 정치적 혼란 없이 경제 성장을 이어왔다.
보츠와나를 찾은 이유는 바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삼각주인 오카방고 델타를 여행하기 위해서였는데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를 출발해 보츠와나의 마지막 목적지인 오카방고로 가는 약 4일 동안 육로를 통해 이동하면서 세로웨(Serowe)와 쵸베(Chobe) 국립공원, 마운(Maun)을 경유하는 일정이다.
보츠와나 국경까지는 차로 약 5~6시간을 꼬박 달려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6시 반쯤 출발했지만 점심때가 훌쩍 지나서 국경에 도착했다.
보츠와나는 이웃국가 어디에서나 육로로 입국할 수 있는데 입국하기 전 전염성 질병 예방을 위해 운전해온 자동차의 타이어와 신발을 소독해야 한다. 이때 탑승자들은 모두 차에서 내려 신발을 소독하는데 그 소독이라는 것이 그저 소독약을 적신 발판 위를 걷는 정도라 아주 금방 끝난다.
다시 보츠와나 보더로 들어가 입국하는 형태로 국경을 넘는 일이 분단국가에서 태어난 여행자에겐 다소 생소한 일일 수 있겠지만 아프리카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보통 절차는 10분 내외로 금방 끝난다.
보츠와나는 사전 신청 없이 보더에서 비자를 받아 입국하는 것이 가능하다. 데스크 너머에서 나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입국 심사 담당 직원은 '얼마나 머무는지', '무슨 목적으로 방문하는지'에 대한 질문 외에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여권에 도장을 '쾅' 받아낸 후, 또다시 한참을 차로 달린다.
세로웨는 약 9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보츠와나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세로웨에서 북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카마 코뿔소 보호구역(Khama Rhino Sanctuary)이 바로 오늘의 정착지다. 이곳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하루를 머물 예정이다.
짐을 풀고 텐트를 치는데 요즘은 버터플라이 시즌이라 그런지 어딜 둘러봐도 나비가 많다. 햇살 아래 따뜻게 모여있던 나비들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바라보다 사진으로 담았다.
캠프 사이트에 있는 나무에 걸린 푯말을 보고 '왜 이런 게 붙어있지?'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계속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보니 웬만큼 크고 멋진 나무에는 사람들이 새겨놓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너무나 많아 기괴해 보일 정도였다. 오죽하면 경고문까지 만들었을까.
드라이버가 시간 맞춰 캠프 사이트로 와주었다. 저녁을 먹기 전 저 차를 타고 카마 코뿔소 보호구역을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서다. 보호구역 입구에서 미리 시간을 예약해 두면 시간에 맞춰 캠프 사이트로 픽업하러 오는 시스템이다.
덜컹거리는 차 위에 앉아 오프로드를 달리다 보면 햇살은 뜨겁지만 이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진다.
라고 하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더위로 고생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건조한 기후 덕분에 그늘에 있으면 꽤 괜찮은 날씨다. 인도나 태국 같은 동남아처럼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날씨와는 다르게 땀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쾌적하다.
덜컹덜컹 오프로드를 달린 지 3분 정도 되었을까? 임팔라 한 마리가 길 위를 가로질러가고 있어 차를 세웠다.
임팔라가 뛰어나온 쪽을 바라보니 그림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가롭게 노니는 어린 임팔라들은 바로 길 옆에 멈춰 선 우리를 의식한 듯 잠시 '얼음'하고 서서 우리 눈치를 보더니 이내 자연스러운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 풀을 뜯고 뛰놀았다.
임팔라들도 한낮의 햇살이 너무 뜨거웠는지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 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윤기 나는 털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쓰담 쓰담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동물들은 오로지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 가능하다.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경계하고 있기에 매우 조심스럽고, 동물들과는 항상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타조가 굉장히 난폭하고 위험한 동물이라는 걸 본 적이 있는 데 아마도 그건 타조도 역시 겁이 많기 때문인 거 같다. 타조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돌린 채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는 데 혹시라도 자신들이 위협을 느끼면 빠르게 도망가는 대신 커다란 덩치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든 선빵이 중요하다는 걸 이곳 타조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카마 코뿔소 보호구역의 주인공인 코뿔소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는 보츠와나에 남아있는 16종의 코뿔 소중에 7종이 서식하고 있다. 모두 다 같은 코뿔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종마다 피부색과 외형이 조금씩 다르다.
한눈에 웅장함과 묵직함이 느껴지는 동시에 마치 누군가 들판 위에 코뿔소 피규어를 총총 올려 둔 것 같다는 비현실 감도 느껴진다. 너무나 멋진 광경에 두 눈을 비비며 이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순간이 현실인지 거듭 질문을 던져본다.
아프리카의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웅덩이 주변에는 코뿔소뿐만 아니라 얼룩말, 자이언트 비스트, 임팔라와 같은 여러 동물들이 모여있었다. 서로 무리를 지어 사이좋게 물을 먹는 모습이 라이온 킹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사진 오른쪽에서 엉덩이를 보여주는 얼룩말들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는데, 얼룩말도 겁이 많아 일부러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뒤돌아 있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보고 있진 않지만 청력이 매우 좋기 때문에 멀리서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의 움직임을 소리로 센싱하고 있는 거다. 볼 수록 귀엽고 순수한 동물들의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물가를 지나 더 넓은 들판으로 나오면 이 구역의 주인공인 코뿔소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멀리 서는 암수를 구별하기 어려운 코뿔소지만 아기 코뿔소가 함께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엄마, 아빠, 새끼가 함께 있는 하나의 코뿔소 가족으로 보인다.
혹시나 차로 돌진하진 않을지, 갑자기 저 뿔로 공격하면 어떻게 도망가야 하는지 걱정이 앞섰는데 그 걱정을 알리 없는 코뿔소는 그저 한가로이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코뿔소와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에 작고 힘없는 존재들이 조용히 구경온 것뿐이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진흙탕에서 한껏 머드 샤워를 즐긴 코뿔소들의 몸에 있는 진흙이 말라가면서 생긴 무늬가 멋스럽다.
코뿔소를 뒤로하고 돌아선 길 위에는 드넓게 펼쳐진 지평선 위로 그림 같은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하늘 아래엔 수많은 동물들과 작은 차 한 대, 그리고 힘없는 사람 세 사람이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황금 들판에 햇살이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또다시 달리고 있는 데 이번엔 어린 얼룩말 한 마리가 앞에 멈춰 섰다.
입에는 먹다만 풀잎을 그대로 문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마초적인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지만 아마도 풀을 뜯고 있던 중에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놀라 '얼음' 한 채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시동을 끄고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니 얼룩말 친구들이 우르르르 나타났다. 크고 작은 얼룩말들은 잠시 일시정지 상태로 멈춰있더니 이내 다시 풀을 뜯으며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얼룩말에 있는 무늬는 사람의 지문과 같아서 그 어느 얼룩말도 같은 줄무늬를 갖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캠프 사이트로 돌아가는 길에 품바 가족들을 만났다. 실컷 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엄마 뒤를 졸졸졸 따라가고 있다. 맨 앞에선 엄마 품바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며 새끼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챙긴다.
짧은 머리 깃을 휘날리면서 엄마 뒤를 부지런히 쫓아가던 품바들의 뒷모습이 참 정겹다.
따로 울타리가 쳐져있거나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가 없지만 이 곳 동물들은 각자의 공간을 지키며 조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텐트가 쳐져있는 캠프 사이트에 오는 길에도 아무런 울타리가 없는 덕분에 동물 친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캠프 사이트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던 중 낯선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돌려보니 내 키만 한 사슴 쿠두가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길래 '안녕' 하고 손을 들어 환하게 인사를 건넸더니 무심한 듯 시크하게 다시 숲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쫓아 가보니 한 무리의 쿠두들이 나무 사이를 산책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쓱 바라보고는 다시 산책을 떠났다.
동물의 왕국 한가운데에 별빛보다 조금 어두운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으면 끊임없이 숲 속 동물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면 모닥불이 어두워지는 만큼 별은 더욱 밝아지고 우리의 이야기는 더욱 깊어진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이면 저 멀리에서 속삭이는 별들의 이야기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던 보츠와나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