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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리 Nov 16. 2019

제주도, 너란 섬은.

맨날 맨날 가고 싶다. 

뭐? 김포-제주 편도 4천 원? 물론 세금 등을 합치면 총결제는 1만 원 정도가 된다. 어쨌거나 용산-광명 KTX가 편도 8000원이니까 이건 정말 거부할 수 없는 딜이다. 일 하지 않는 자의 여행 일정은 이렇게 항공사의 초저가 이벤트에 맞춰 시작된다. 


순식간에 비행기 예약을 하고, 숙소를 잡고,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선다.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4천 원 찬스를 잡은 사람들의 얼굴이 만족스럽다. 저녁 늦은 시간에 도착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제주시의 빌라촌 근처는 중국어 간판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급한 마음에 예약할 때 이름에서 ㄴ을 빼 먹어서, 공항에서 5천원을 더 주고 이름을 수정해야 했다는 것은 함정이다. 이번 만 5천원 받고 해주겠다며, 항공사 직원이 큰 선심을 썼다. 다음엔 안되요. 나는 연신 아이고 고맙습니다요를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럴 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표현을 쓰던가.) 


제주는 1년에 한 번은 오게 되는데, 올 때마다 새롭다. 처음엔 주로 이름난 관광지를 다녔고, 다음엔 올레길을 모두 걸었고, 다음엔 오름(기생화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들을 다니게 되었다. 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는데, 1년을 살면서 1일 1 오름을 해 보는 프로젝트는 어떨까. 시간이 많으니 생각도 많다. 


이번 해 제주에는 태풍이 7번이나 들었다. 일조량이 부족해서 아직 감귤의 당도가 올라오지 않았다고 펜션 주인이 시름 섞인 소리를 한다. 다행히 귤은 낙과 피해는 별로 없는 작물이다. 태풍에도 쉽사리 떨어지는 법이 없다. 남은 것은 자리를 잡고 끈질기게 햇볕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이번 여행은, 대충 제주를 크게 한 바퀴 도는 루트가 되는데, 주로 가벼운 걷기를 위한 여행이다. 설렁설렁 며칠 동안 다닌 곳은 7곳이다. 러키 세븐. 이 말은 어쩌다 이렇게 옛날 느낌을 가지게 되었지. 내가 섬에 머무는 내내 운이 좋게도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고, 햇살이 따라다녔다. 


어승생악-서귀포 자연휴양림-원앙폭포 언저리-다랑쉬오름-성산일출봉-우도-동백동산

{어승생}, 도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도 없는 이름의 오름이다. 공항이 있는 제주시와 가까워서 첫 번째 코스가 되었다. 작은 한라산이라고 불리는데, 이 오름의 정상에서 보는 한라산의 모습이 기가 막히다. 1169m 높이로 탐방로가 꽤 잘 갖춰져 있어, 1시간 정도 산책하듯 올라가기 좋다.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 이 오름의 본명은 어으싕오름 또는 어스싕이오름. 한자 차용 표기로 어승생악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이 오름 밑에 있던 국영 목장에서 임금이 타는 어승마가 탄생했기 때문에 어승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다른 동일 음의 한자가 사용되었다면 다른 스토리텔링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흥미로운 이름이다. 


정상에 오르니 까마귀와 인간이 대치중이다. 덩치가 큰 까마귀들이 동네 양아치처럼 어슬렁 거리며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인간들은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모여있다. 원래 제주도에 까마귀가 이렇게 많았었나 했는데, 원래 많았다고 한다. 이제껏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다. 


제주도에서 우리나라 길조인 까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며 20여 년 전에 60마리를 풀었는데 이것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20만 마리를 넘어서고, 이 기세에 까마귀들이 산 쪽으로 쫓겨나 산에 까마귀들이 많아졌다는 설명을 보고 있으니 그저 웃프다. 인간이 하는 일이란...... 


{서귀포 자연휴양림} 이 안에서 숙박이 되는 줄 진작 알았다면 여기서 머물렀을 텐데 정말 아쉬웠다. 아마 예약 경쟁이 치열하겠지. 휴양림 안에 있는 시설들이 꽤 운치 있었다. 


탐방로가 아주 잘 조성이 되어 있고, 길의 끝에 편백나무 숲길이 있다. 그 안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려니 숲길의 미니 버전 느낌이었다. 이 곳이 치유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건강 탐방로는 길 중간에 지압돌이 깔려 있다. 길 시작 지점에 발 지압이 얼마나 몸에 좋은지 설명서를 보고 있으면, 누구나 그 앞에서 홀린 듯 신발을 벗게 될 것이다. 


나도 '건강'이라는 매직 키워드에 민감한 중년이다. 어김없이 그 길을 맨발로 걷기 시작했는데, 발바닥이 아파서 몇 발자국 걷지도 못했다. 


다른 중년의 관광객들도 시도를 하는 것이 보였는데 이 길에서는 모두 가장 겸손한 자세를 하고 비명을 지르게 된다. 꽤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고생해 오던 발이 오랜만에 주목을 받았다. 맨발로 지압돌 위를 걷는 것은 포기하고 평지를 걷기 시작했다. 흙길 옆으로 난 도보용 아스팔트 길이다. 딱히 낭만을 찾긴 힘들지만 그래도 발바닥이 시원했다. 여기도 왕복 2시간 정도로 주로 둘레길처럼 평지로 되어 있어서,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맨발로 걸어서 그런지 밤에 푹 잘 수 있었다. 


{원앙폭포} 사실 펜션에서 가깝다는 돈내코 계곡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길을 잘못 들어서 원앙폭포의 하류 쪽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나는 지도를 잘 읽지 못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곤 한다. 이것은 길을 잃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작금의 4차 산업 시대에 진정한 모험가가 가져야 할 스킬이 아닌가. 

원앙폭포를 향해 오르지 않고 사잇길로 내려가면 다다르게 되는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이 거쳐간 흔적이 없는, 누가 와서 먹을지 궁금한 깊은 산속 옹달샘이다. 오랜 시간 이끼가 껴서 청록색이 된 바위와 바닥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물이 흐른다. 물이 차갑다.


사람이 없는 것은 아마도 계절의 이유 이리라. 여름엔 사람들이 넘쳐나겠지. 특히나 이렇게 싱그러운 새소리와 깨끗한 물이 있는 곳은. 어떤 인간들은 깨끗한 곳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한다. 더럽히고 싶어서다. 거기에 굳이 들고 간 페트병이라도 버려야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었다. 자연과 페트병은 좀처럼 섞일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 아쉽다. 


바위에 앉아서 보온병에 담아 간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를 뜰 때까지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랑쉬오름} 원래는 용눈이 오름을 가려고 했지만 엄청난 인파를 보고는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용눈이 오름은 원래도 유명했지만 억새풀이 가을 정취를 더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다랑쉬 오름은 용눈이 오름에서 차로 7분 정도 거리에 있다. 

거리는 가까운데 비포장 도로이다 보니 운전이 쉽지 않았다. 현재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아 내년에는 좋은 길로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용눈이 오름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오르지만, 다랑쉬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다. 숲 속으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꽤 경사가 가팔라서 숨이 차 오른다. 여기도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별다른 장비 없이 오를 수 있지만, 경사가 있어서 비가 오거나 하면 꽤 미끄러울 것이다. 


다랑쉬란 이름은 이 오름에 뜨는 달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올라가서 보는 정취는 이름값을 한다. 정상에는 둘레 1.5킬로 깊이 150미터의 깊고 넓은 분화구가 있고, 이 둘레를 돌면서 산책을 할 수 있다. 멀리 성산일출봉과 함께 시내가 훤히 보인다. 가슴이 뻥 뚫린다. 


신세대 청년들이 정상에서 드론을 날리고 있다. 그 소음이 너무 심해서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까마귀들이 드론과 함께 날고 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드론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제주 사람들은 죽으면 오름에 묻혔다. 군데군데 묘와 비석들이 보인다. 비석에는 묻힌 오름의 이름이 들어간다. 다랑쉬 오름에는 4.3 항쟁의 아픔도 함께 묻혀 있다. 다랑쉬굴에 숨어 있던 피난민 11명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것이다. 1991년에 시신이 발견되어서 큰 뉴스가 되었다고 하는데, 가보면 이 현장의 보존 상황이 너무 엉성해서 다시 한번 마음이 아파진다. 


{동백동산} 함덕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동백동산은 원시림의 모습이다. 5.3킬로의 산책길로, 제주를 떠나기 전 아침에 걸었는데 일찍부터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조깅코스인 것 같았다. 군데군데 뱀 조심 푯말이 붙어 있고, 넓게 습지가 조성되어 있어 햇볕이 없으면 꽤 음침해 보이는 곳이지만 정막 하고 고요한 깊은 숲을 느낄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사리아를 넘어 포르토 마린 쪽으로 걸어가는 숲길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길. 그 길 보다 제주도의 동백동산이 더 좋은 것은 사람이 많지 않고, 특히 자전거의 경적 소리가 없다.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어두운 숲 속 가운데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첫 문장이다. 여기 서 있으면 나에게도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날 것 같다. 그가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며, "잘 봤냐. 이제 어느 길로 가야 되는지 알겠냐."라고 물을 것이다. 


"알긴 아는데.. 아시잖아요. 선생님. 인간이라는 게 어리석어서 알면서도 그 길로 가는 거. 올바른 길이라는 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망했어요. 전."


제주도에 올 때마다 마지막 날 밤엔 부동산 시세를 알아본다. 여기서 살 수 없나 고민하다 서울에 올라가서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삶은 계속된다. 이것은 1년에 한 번씩 반복되는 루틴이다. 



성산일출봉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더 이상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확실했다. 여긴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하는 곳이다. 끊임없이 형상이 바뀌고 있다는 성산일출봉. 매년 1미터씩 가라앉고 있다고 했던가. 그러나 널브러진 페트병들을 보면 끔찍하다. 중국인 관광객을 탓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우도의 아름다움도 어디 가질 않았지만, 값만 비싼 짜장면은 맛이 없고 색이 바랜 마징가제트는 더 흉물스러워졌다. 현재 우도의 고민은 바다로 떠밀려오는 쓰레기와, 관광객들이 배출하고 가는 쓰레기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나로 인한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 해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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