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리 Nov 05. 2019

21세기 빨강머리 앤

Marilla Cuthbert has got mellow

1986년 5월 12일. 무슨 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옆집 사는 언니에게서 '빨강 머리 앤' 책을 선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책 속에 쓰인 메모를 보고 알게 된 것인데, 정작 언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안경을 썼던가. '옆집' 어린이를 위해 서점에서 동화책을 고르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참 귀엽다. 그때의 내가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했을지 의문이라 다시 해 본다. (정희 언니, 고맙습니다)


출처: 내 책장

그 시절 책들은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 '빨강머리 앤' 만은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아쉽게도 당시 까막눈이었던 내가 선물 받은 책을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이름만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 시절 텔레비전에서 했던 만화 '빨강 머리 앤'의 인기는 대단했으니까. 


얼마 전 넷플릭스의 앤 Anne(빨강 머리 앤)을 보았다. 이게 얼마만인가. 정말 친했지만 잊고 살았던 동네 친구를 우연히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앤, 기집애 넌 여전하구나. 지금도 대책 없이 긍정적이고 수다스럽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 하고. 너는 아직 11살인데, 너 보다 어렸던 나의 시간 만은 이렇게 흘러 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것은 오히려 마릴라에게 검정을 이입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마릴라는 차갑고 시니컬한 성격이지만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녀와 메튜 모두 소위 츤데레 느낌의 중년이다. 말은 없지만 속 깊은 정과 무엇보다 자신들 만의 유머가 있다. 


Life is worth living as long as there’s a laugh in it  
그 안에 웃음이 있는 한, 삶은 살 가치가 있어. 


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정말 이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에는 여러 만남이 있다. 어떤 만남은 서로의 세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앤과 마릴라의 경우가 그렇다. 마릴라는 어린 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던 불행의 연결 고리를 끊어주었고, 앤은 마릴라가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본모습과 삶에 대한 열정, 웃음을 찾아주었다. 

출처: Anne, netflix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 속의 대사들이 있다.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되면 종종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Anne: Kindred spirits are not so scarce as I used to think. It's splendid to find out there are so many of them in the world.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마음 맞는 동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많다는 걸 알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Marilla: Oh, Anne, I know I’ve been strict and harsh with you maybe–but you musn’t think I didn’t love you as well as Matthew did, for all that.  I want to tell you now when I can.  It’s never been easy for me to say things out of my heart, but at times like this it’s easier.  I love you as dear as if you were my own flesh and blood and you’ve been my joy and comfort ever since you came to Green Gables. 앤, 내가 지금껏 너에게 때론 엄격하고 가혹했을지는 몰라도, 나도 널 매튜만큼 사랑했어. 난 원래 내 가슴속 얘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지금 만큼은 해야 될 것 같구나. 난 네가 내 친 자식인 것처럼 널 사랑한단다. 네가 그린 게이블로 온 그 순간부터 넌 내 삶의 즐거움이자 위안이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는 초긍정주의자 앤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Marilla, isn't it nice to think that tomorrow is a new day with no mistakes in it yet?  마릴라, 내일은 아직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은 온전히 새로운 날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아요?  


영화 애니 Annie가 떠오른다. 빨간 곱슬머리 여자 아이의 활약은 여기서도 대단하다. 말괄량이 삐삐(Pippi Longstocking)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Anne과 Annie는 고아라는 환경 속에 놓여있으면서도 긍정의 화신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이 긍정의 토대는 새로운 내일에 대한 믿음이다. 

출처: Annie, Disney
Tomorrow 듣기: https://youtu.be/KahOD-93D7U

When I'm stuck with a day that's grey and lonely, I just stick out my chin and grin and say. The sun'll come out tomorrow So ya gotta hang on til tomorrow, come what may. Tomorrow, tomorrow! I love ya tomorrow! You're only a day away!


지금 내가 깨닫고 있는 것들을 앤의 말로 다시 듣게 된다. 111년 전에 태어난 앤의 말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명작의 동 시대성이란 그러 것이다.  


After all, " Anne had said to Marilla once, "I believe the nicest and sweetest days are not those on which anything very splendid or wonderful or exciting happens but just those that bring simple little pleasures, following one another softly, like pearls slipping off a string. 앤이 언젠가 마릴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 최고로 멋지고 즐거운 날들은 뭔가 엄청나거나 굉장한 일이 일어난 날들이 아니었어요. 마치 진주 목걸이에서 알이 스르르 풀려서 떨어지듯, 소박하고 작은 기쁨들이 연이어서 계속되는 그런 날들이었어요." 


언젠가 조카 어린이와도 이 책을 함께 읽는 날이 오겠지. 아니, 나도 옆집 어린이에게 아무 날도 아닌 그런 날, 평생을 간직하게 될 책을 선물해야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지금, 소박한 기쁨이 넘쳐난다. 


현재의 내 이웃은 온라인 쇼핑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자 어른이다. 매일 새로운 택배 상자가 문 앞에 놓여있다. 그에게 책을 선물해야 할지, 다음 이웃을 기다려야 할지 고민이다. 





Photo by Emma Simpson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신문기자新聞記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