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불문하고 두 개의 우주에 사는 사람들
페이스북에 ‘과거의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5년 전 내 글 포스팅이 떴다.
육아 휴직 하고 복직 한 뒤의 글이다. 그 때 아이들은 4살, 5살이었다. 주말에 아이들 케어에 신경 쓰고 나면, 회사가는 게 오히려 기다려 지기도 했던 것 같다. 회사에 있으면 오히려 더 내 자신으로 정신 바짝 살 수 있어서, 월요일에 회사 와서 드륵드륵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고 일을 시작하면 마음이 오히려 평화로웠다. 잘 하려고 해도 여간해선 반짝하지도 않고, 이내 도돌이표인 생산성 안 나는 가사 일에 대한 좌절감을 잠시 잊을 수도 있었고, 누가 차려주는 밥을 몸만 쏙 가서 사 먹고 나오는 점심시간도 좋았다.
그래도 퇴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빨리 가서 아이들 얼굴이 보고 싶었다. 포동한 팔목과 아직 지문과 굳은살이 제대로 박이지 않은 아이의 손과 발을 만져보고도 싶고, 이제 막 제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아이의 엉성한 발음과 부족한 문장 구조로 된 말소리도 듣고 싶었다. 바삐 회사 문을 나서는 이유는 그런 낭만적인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어린이집에서 우리 아이가 제일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되면 아이한테 너무 미안할 거 같았다(사실, 아이는 늦게 까지 선생님과 단독으로 있으면서 선생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도,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엄마의 죄책감 또는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또, 빨리 집에 가서 밥 준비, 아이들 씻기고 밀린 빨래 등을 제시간에 하고 내 시간을 갖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퇴근시간 여섯 시는 늦은 시간이었다. 평일은 그저 먹고 씻고, 자기 바쁜 나날들이었다(늘 아이들 재운다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는 왜 내가 먼저 자는지). 주말에는 또 밀린 집 청소와 결혼하고 두 배로 늘어난 경조사, 평일에 못 본 아이들과 노느라 분주했기 때문에 일할 시간은 역시 따로 나지 않았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는 일하다 길어지면 자연히 1-2시간 더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에 돌아온 후에는 6시 이후에 일을 하는 경우의 수는 철저히 줄였다. 오늘 꼭 끝내야 하는 일은 화장실도 가지 않고 하되, 일들의 우선순위를 잘 가려 순위에서 밀리는 일은 당연히 내일로 미뤘다. 예전에는 딱 두시간 일 더하면 깔끔히 일 마무리 하고 내일은 새로운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데도 컴퓨터 닫고 그냥 가는 사람들을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제 나에게는 ‘똥누고 밑을 닦지 않은 애매한 상태 그대로 두고’ 퇴근을 하는 게 당연해 졌다. 나는 그렇게 아줌마인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줌마인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우주가 회사와 집 두 개가 되었다. 나는 두 우주의 밤낮을 오가며 모드를 갈아 탔다. '집 우주'는 새로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왔으니 그렇다 치고, '일 우주'는 머무는 절대 체류 시간이 훅 줄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게 '일 우주'에게나 나에게나 필요했던 전환점이 었던 것 같다.
일단, 기계적으로 쳐내는 일이 줄어들었다. 무조건 즉각 쳐내던 일들에 내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저효율을 인정하고 나니 일을 무조건, 어떻게든 해치워 내는 일의 양보다 일의 질에 집중하게 되었다. 전날 마무리 짓지 못한 내용을 다음날 새 기분으로 마무리하게 될 때 전날 빨리하려고 놓쳤던 부분과 실수를 다시 살피다 보면, '이거 그냥 욱여 넣어 일 스타트했으면 큰일날 뻔 했네' 라는 생각이 들 때 도 있었다. 일을 쳐내는 양은 줄었지만, 그렇게 정확도가 늘었고 같은 일 두 번 일할 시간이 없으므로 더 꼼꼼해 졌다. 또, 내 말을 이해하는지 마는지 모를 아이를 키우면서, 나와 너무 다른 내 삶의 동반자인 운명 공동체 남편과 살면서, 자연스럽게 습득된 인내와 배려심, 책임감으로 얻은 지혜도 일에 장착되었다. 사람 다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아이와 남편의 다름을 받아들이니, 절대 이해못하겠는 존재에 대한 배려도 늘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다 부모 힘들이고 세상에 나와 컸다고 생각하니, 좀 더 다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게 되었고, 내 말이 맞다는 주장도 조금 더 유연해 지기도 했다. 일에 대한 이글이글함은 줄었지만, 동료들은 왠지 마리가 변했는데 아줌마 마리가 더 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좋은 변화만 감지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두 우주를 사는 동안, 회사도 동료도 나의 달라진 모습에 적응해야 했을 것이다. 두 우주에 사는 아줌마 일하는 사람을 한 우주에서만 보는 일터의 동료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닌데, 다른 사람과 공격적으로 각을 세우진 않는 사람. 그래서 자기의견은 조금 티미한 사람. 남의 실수를 잘 이해하지만, 그 만큼 자기 실수도 떳떳이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하는 뻔뻔한(?) 사람. 기한을 맞추긴 하지만, 예전과 달리 너무 널찍이 기한을 이야기하고, 내일로 미룰 수 있는 것은 내일로 잘 미루는 사람. 일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같이 일하면서 의견도 묻고 경험도 배우고 싶은데, 자기 일에 바빠 다른 사람 일을 봐 줄 겨를이 없는 사람. 같이 야근하면서 치맥도 하고 친해지면 좋은데 늘 칼퇴를 하는 사람. 그러기에 일 템포를 빠르게 챡챡 함께 맞추긴 어려운 사람,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 분위기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 같은데, 회사가 우선은 아닌 게 확실한 사람.
즉, 동료로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 언제나 두 개의 우주에 살며, 상대적으로 우선순위는 다른 한쪽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사람. 살아온 궤적으로 자기 곤조가 있으나, 남에게 열렬히 주장하지도 않고, 남의 말을 잘 따르지도 않는 사람. 함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절박하게 일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며 긴박함을 함께 맞서며 전우애같은 동료애를 느끼기는 어려운 사람. 그렇게 늘 한 우주에 함께이면 좋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게 하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르겠다.
나, 아줌마가 연대와 협력 하기에는 가장 힘든 존재 아닌 가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갈 다른 우주가 있어 그런지 서로 다를 때, 끝까지 싸워 일을 만들어내진 않는 사람, 하나로 똘똘 뭉쳐서 일을 만들라치면 쉽게 물러서는 아줌마. 아줌마가 진지하게 찰싹 붙어서 일의 피치를 올리면 참 팀 성과가 좋아질 텐데, 아줌마는 늘 요리조리 사정이 있어 함께 일하는 시간은 짧고, 다름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에 아줌마와 의견을 충분히 나누는 시간은 부족하다. 그런 아줌마와 무엇을 같이 도모하지 않는 게 상책일까?
‘아줌마’라는 명사를 썼지만, 남녀 불문하고, 나이가 들어 일에 경륜이 쌓이고 다른 취미와 활동이 아이키우는 일만큼 중요한 사람에게는 위의 캐릭터가 동일하게 적용 될 거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 아줌마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아줌마인 우리와 어떻게 함께 일하면 좋을 까?
나 같은 사람과 일하는 법은 내가 잘 알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