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안 되던 밤샘의 기억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처음 읽은 건 12년쯤 전인거 같은데, 나는 지금까지도 여기에 나오는 마리가 소설 속 캐릭터 중에서 가장 좋다. 딱히 영화 속, 연극 속, 뮤지컬 속 등등의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는것도 아니니 그냥 가상의 인물 중 가장 좋은 걸지도.
고교 시절, 대전 롯데백화점 2층에 있던 서점에 내가 20분쯤 먼저 도착하고 친구가 30분쯤 늦게 도착하던 날, 마침 나와있던 하루키 신간이던 이 책을 선 채로 거의 다 읽고 사들고 나왔다.
백설공주 같은 미모지만 그다지 지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언니와 선머슴 같은 외양의 지적인 여동생(책에 대충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책은 어느 날 밤부터 아침이 되기 직전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한 챕터씩 번갈아 보여준다. 지금도 사실 작가의 의도는 잘 모르겠고, 물론 책 말미에서 어떤 해설 등을 읽었을 것 같지만 기억이 안 나는걸 보니 나한테 중요한 게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던 듯.
내가 좋아하는 대목은 책의 도입이다.
책의 도입은 자정쯤 된 시각, 일본의 흔하디 흔한 패밀리레스토랑 '데니스'에서 첫차가 올 때까지 시간을 죽이고 있는 주인공 마리의 모습을 묘사한다.
겉을 제목 없는 표지로 감싼 두툼한 책. 청바지, 맨투맨 같은 꾸밈없는 옷차림. 테이블엔 담배. 의자엔 보스턴백. "내용이 간단치 않은 책인 듯 미간을 찌푸려 가며 집중하는 표정". 뭐 이런 표현들이었는데 24시 패밀리레스토랑의 쨍한 조명 아래에서 심야에 저러고 있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란 왜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
나도 언젠가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저렇게 책을 읽으면서 밤을 지새워보겠다,고 그때부터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에게 마리의 그날 밤은 멋진 밤샘의 표본 같은 거였다.
2년인가 후 밤샘은 익숙한 게 됐다.
나는 대학생이 됐고, 무수히 많은 밤 술을 마시다 막차를 놓쳤고, 놀랍게도 택시비가 아닌 택시공포증(이로부터 7년쯤 후 수습기자 2일차에 사라졌다) 탓에 꾸벅꾸벅 첫차를 기다렸다.
하지만 마리처럼 해보기가 거 참 쉽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무엇보다 서울엔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이 없고, 데니스는 아마도 한국에 없고, 차선책으로 들어갈 만한 커피숍들은 (이를테면 그즈음 생겨난 커핀 그루나루)꽤 있었지만 들어갔더니 책을 읽기엔 너무 취해있고 피곤하고... 그래서 결국 대학로 '가비아노 피우'에서 맥주를 더 마시거나 대학로 '오감도'에서 순두부 찌개나 먹으면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10년 넘게 못해본 마리스트 밤샘의 갈증을 푼 건 최근. 갑작스런 나고야 출장을 가게 됐고, 4박5일 일정 중 후반부의 이틀을 혼자 머물렀다. 식당에서 혼밥을 하고, 혼술도 하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에 데니스가 있었다. 정말 24시일까? 두근두근 하면 들어간 그곳은 정말이지 쨍한 조명 아래 듬성듬성 간격을 두고 앉은 사람들이 아무리 봐도 이 밤을 즐기고 있다기보단 견디고 있단 표정으로 스파게티를, 쌀국수를, 볶음밥을 먹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마리는 샐러드에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마도 가벼운 소설은 아닐 어떤 책을 읽고 있었고, 다카시인가 다카하시인가가 그 앞에 뻔뻔하게 앉더니 토스트를 시키고 이렇게 현대화된 도쿄에서 토스트를 바짝 구워달란 주문이 번번이 묵살되는 현실을 개탄하고....호텔로 돌아가는 길 약간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들썩였고 나는 삿포로인가 기린인가 아무튼 생맥주를 두 잔인가 먹으며....인스타 피드도 보고 전자책도 잠깐 봤다. 절반의 성공. '출장가면 개고생'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출장이 이것만으로 보람찼다.
세상의 모든 메뉴를 다 팔지만 그런 곳에서도 생맥주는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