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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에 공기가 서늘하고 바람이 차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팔짱을 끼며 바람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집 앞이니까, 금방 들어올 거니까 괜찮아’하고 가볍게 나간 차림에 경고라고 주듯 가볍게 부는 바람도 냉풍이다. 건널목을 건너 우측으로 돌아서자 갑자기 등이 따뜻해진다. 바람에 공격당한 내가 안쓰러웠던지 한낮의 햇살이 내 등에 핫팩을 붙여주는 것 같다. 순간의 따뜻함에 기분이 좋아진다. ‘역시 해가 다 이겨’라고 생각한다. 거센 바람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했지만, 햇살은 스스로 겉옷을 벗게 한다는 우화처럼 밝고 부드러운 햇살에 고마움이 들었다. 그런데 해는 선하기만 할까? 모든 것엔 양면성이 공존한다.
주말의 이른 시각, 쿠팡의 개인정보유출 문자를 받고 이번에도 내 정보는 빠뜨리지 않았다며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모든 사이트를 이용하는 동안 혜택을 받은 적은 없지만 개인정보 유출만큼은 우수 고객처럼 빠지지 않고 챙겨준다. 마트, 금융사, 구직 사이트, 쇼핑몰, 통신사 등 빠름을 중시하는 인터넷 강국에선 개인정보도 빠르고 넓게 털린다. 모든 곳에 돌아가면서 다 털리고 있다. 그래서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 “이번엔 너냐?”하고 한숨 쉴 뿐. 반복적으로 이럴 거면 정부는 주민번호 변경이라도 해주길 바란다. 전화번호나 주소는 바꿀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평생을 쓰는 주민번호는 심각한 정보침해가 아닌 이상 바꿀 수 없게 하고 있다. 20세기에 출생신고 한 사람은 생년월일과 몇 가지 정보만으로 주민번호도 유추가 가능해 더 쉽게 털리고 인생 전반에 걸쳐 꾸준한 유출이면 심각한 개인정보 침해 아닌가. 연령대가 높을수록 스팸이나 스미싱, 국가기관 사칭 전화를 받는 일이 많은데 이쯤이면 유심 바꿔 끼우듯 주민번호도 갈아줘야 한다.
물건을 훔치는 범죄는 물건값의 피해지만 사람의 정보는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는 심각한 범죄인데 너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기계화되고 편리함의 이면에는 한 방에 인생을 해치는 폭탄이 숨어있어서 싫다. 기술의 혁신만큼 누군가 당하는 일도 획기적이어서 기술문명이 인간을 편리하게 하는 것보다 피해자를 만드는 게 우려스럽다. 가끔 스마트폰 이전의 세상이 그립다. 알아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눈앞에 대령하는 지금이 아니라, 그래서 정보량에 질식해 인공호흡기까지 써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원할 때, 선택해서 취득하고 조절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싶다.
쿠팡의 정보유출 다음 날, 밤새 ‘다음’이 대대적 점검을 했다더니 메일앱 로그인이 안 되고 있다. 로그인하려면 별도의 메일 인증을 거치고 뭔가에 동의한 뒤 연락처 인증까지 해야 하고 새 버전으로 업데이트를 해야 한단다. 신규 가입자의 복잡한 절차를 기존 가입자에게 강요한다. 이미 사용 중이고 메일함에 남아있는 내용을 살리려면 이 불편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꾹 참으며 모든 절차와 인증을 진행하고 최종적으로 로그인 버튼을 눌렀는데 온갖 에러 메시지가 뜨며 다시 원점이다. PC로 로그인해서 앱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캡처해 접수하는데 그 접수마저 되지 않는다. 이건 뭐 PC통신 시대로의 회귀인가. 디지털 강국에서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화가 올라왔다. 진작 다음 계정을 없애야 했는데 카카오는 장기 사용자를 이렇게 애먹인다. 관성이란 무섭다. 메일에 무수하게 연결된 블로그와 카페, 브런치, 구글, 보험, 통신사, 공공기관 등 많은 걸 정리하기엔 번거로우니 그냥 쓰게 되는 이 구조가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현재를 사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미 업데이트를 누른 이상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니 망할 디지털 문명 속에서 편리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 핸드폰과 인터넷 없이 살아보려 해도 전입신고나 도서관 회원증을 만드는 것조차 집 전화가 아닌 휴대전화가 필수여서 고요하고 무소유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선택권을 침해한다. 보험약관의 깨알처럼 작게 써진 ‘보상하지 않는 손해’처럼 인간에게 있다는 자유의지도 나라가 정하는 범위 안에서 제한된다. 사람을 위하고 소중하게 보호한다며 수집한 모든 기업은 햇살 같은 표정과 말을 하면서 실제는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난폭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집단소송에 참여하겠다며 양식을 클릭했다가 닫았다. 소송에 필요한 필수항목에 주민번호와 연락처, 주소까지 개인정보를 상세하게 적어야 한다.
정말 편리한 세상일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