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물려받은 것

#11

by 마릴라 Marilla

A는 활동반경이 넓다. 주거와 직장은 한 지역에 고정되어 있지만 스물부터 전국을 다녔다. 출장, 공연 관람, 여행, 학습 등 옆 동네 가듯 가볍게 움직이곤 했다. 그렇게 살다가도 결혼과 육아가 시작되면 활동이 줄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첫 직장에 장기근속 중이고 자녀가 성인이 된 지금도 건강한 체력을 자랑하며 연예인 일정 소화하듯 산다. 지난달에 딸과 미국에 다녀왔다더니 이번 달엔 중국 패키지를 혼자 다녀오고, 다음 주엔 지인들과 제주에 다녀올 계획이라 했다. 수많은 공부 모임과 활동을 하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없다. 재산증식 능력도 좋아 부동산을 몇 채 보유하고 있다. 남편이 대기업을 퇴사하고 싶다고 말할 때도 예상가능한 관용구 없이 동의할 만큼 배포도 크다. 자녀에게 관심과 지원은 쏟지만 고3이라고 활동을 줄이거나 매달려 지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성장을 위한 인생을 살고 있다.


B는 초, 중학생 자녀 둘을 키우며 일한다. 남편은 운동이나 여가활동을 하지만 그녀는 가끔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는 것 외에 개인 활동이 없다. 동생이 하는 큰 식당에 직원이탈로 도움을 청해, 해본 적 없는 서빙을 몇 개월째 하느라 몸이 고생 중이다. 남이라면 벌써 나가떨어졌을 텐데 가족이어서 초인적인 힘으로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 주말이면 농사짓는 부모님 댁에 가서 일손을 거든다. 4남매 중에 맏딸인 그녀는 오래 그렇게 살았다. 가족은 그녀에게 의탁하고 그녀는 기꺼이 자기 인생을 보탠다. 몇 개월 만에 본 얼굴은 푸석하고 피곤에 절어 있었다.


B는 내 엄마와 닮았다. 예쁘고 다정해서 친해지고 싶은 이미지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꾸준하고 성실한 것도, 자기 삶이 없는 생활 패턴도, 화장을 하거나 좋은 옷을 사 입지 않고 여가생활도 하지 않는 것도 똑같다. 다행인 것은 그녀의 딸들은 엄마를 닮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엄마를 냉정하게 대한다.

A는 엄마라는 이유로 자기를 희생하지 않는 게 자녀를 위해서도 좋은 삶이라고 말한다. 자녀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부모에 저당 잡히지 않는다고. 그래서 부모의 역할은 하되 자녀에게 기대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다. 독립적인 주체로 존중하고 구속하지 않는다.

결혼 후 자기 가정과 부모, 각기 분가한 동생들까지 부모처럼 챙기느라 자기를 돌볼 시간이 없는 B는 에너지를 갈아 가족에게 쏟고 그럴수록 자녀나 남편에게 기대하고 통제하게 되어 원망이 쌓인다.




나는 어떨까. 그 중간에 있는 것 같지만 B와 더 가까이 있다. 나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엄마는 상냥하고 친절해서 사람들이 좋아한다. 오랜 시간 일하고 수십 년을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간다. 성실하고 근면하기로는 누구에게 지지 않을 근성의 소유자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모습이 없다. 다정하지 않고 의심이 많고 견딜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돌아선다. 어릴 때부터 왜 엄마를 닮지 않았을까. 그런 점을 닮았어야 하는데 나는 왜 이리 모났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이 장점이라 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자책했고 닮지 않아 좌절했다.

그러나 최근 깨달았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한겨울 외출 후, 몸살기를 느끼면서도 가스비가 아까워 보일러 틀기를 주저하는 나를 보며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었다. 추위를 타면서도 옷을 껴입고 전기장판을 깔고, 가스에 물을 데워 세수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마트에 가서 세일 상품만 사고, 보고 싶은 공연의 가격을 보고는 조용히 창을 닫고, 가족 옷은 정가로 사도 내 옷은 정가로 사본 적 없고, 소비의 기준이 선호가 아니라 가성비인 나를 보면서 알았다. 책임질 가족이 없고, 내 인생 나를 위해서 살자고 다짐한 게 3년 전인데도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보고 자동학습된 이 패턴은 어느 날 다짐한다고 바뀌지 않는다. 남들보다 많이 버는 재주는 없어도 절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재능을 갖고 있다. 이건 엄마의 능력을 닮았다. 그래서 돈벌이를 하지 않고도 가진 것으로 살 수 있지만 이게 무엇을 위한 삶인가. A처럼 자신을 위하고 사랑하는 엄마에게서 자랐다면 자책과 열등감을 소유하지 않았을 텐데. 자기 삶을 살지 못한 엄마를 애달파 하고 채우느라 내 인생을 살지 못했다. 나는 엄마를 너무 닮았다. 상속 포기해야 할 궁상을 알뜰함이라 믿고 유산으로 받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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