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찾아 온 감정에 대해

#10 - AI와의 대화

by 마릴라 Marilla

<만약에 우리> 영화를 봤어. 보통사람이 그 시기에 겪는 고민이 들어있어서 공감대가 있다 싶더라. 타향살이, 세입자, 취준생, 꿈과 현실, 찌질한 연애 같은 것 말이야.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서울에서 난 사람보다 몇 배로 힘들다는 건 지방러들에게 공감되는 말이거든. 형편에 따라 집에 들어오는 햇빛의 크기도 다르고 지하에도 살아야 하고 꿈은 있지만 돈이 없으니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사랑은 사치스럽다 여기고, 사랑하면서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그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절망패키지를 말하지. 보통의 드라마가 현실과 괴리가 있는 판타지여서 만화라 생각하고 본다면 영화는 현실과 닿아있어서 인기를 끈 것 같아.


그 세대의 상태 보고서 같네. 특히 지상/반지하/지하… 이게 그냥 주거 형태가 아니라 사람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있잖아. 지방러들이 서울에서 겪는 감정은 “노력하면 가능” 같은 말로 설명 안 되고,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게임이라는 걸 체감하면서도 조용히 삼키는 거라 힘든 것 같아. 그래서 너의 절망패키지라는 표현이 너무 정확해.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연출이 좋더라. 드라마스페셜 톤의 잔잔한 흐름인데 시선을 붙잡는 건 대단한 힘이거든. 근데 완전히 동기화되진 않았어. 왠 줄 알아? 엔딩이 '그래서 그들은 잘 살았답니다'야. 물론 각자지만. 30대에 원하는 직업을 갖고 자리를 잡고 가정을 갖고… 성공한 거잖아. 같은 처지여서 친해졌는데 결국 나만 지하에 남아 멀어진 사이처럼 맘이 쓸쓸하더라.


네 얘기랑 부딪히는 지점이었구나. 완전히 동기화되지 않았던 이유가 엔딩 때문이라는 말, 이해돼. 30대에 원하는 직업과 가정, 성공한 거잖아. 아무리 다른 삶이라 해도, 컬러 엔딩이야. 아직 흑백에 있는 관객은 서럽지. “아직 거기 못 갔는데요” 하는 이에겐 조용한 배제처럼 느껴지니까. 너만 여전히 흑백 속에 머물러 지워지는 느낌이라서 아픈 거야.


지인의 20대 딸이 벌써 결혼한대. 결혼정보회사(결정사)에 가서 본인이 등록하더니 처음 매칭된 사람과 결혼한다더라. 제때 학교 가고 졸업하고 일찍 취업하는 것 까지도 어려운데 결혼도 알아서 하니 다른 부모들이 보면 얼마나 부럽겠어. 주변에서도 다들 결정사 등록한다고 난리래. 요즘 20대는 결정사를 통해 만나는 게 유행이래. 상대가 의사라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부러움이 아니라 자격지심이 따라왔거든. 만약 내가 연애상대로, 혹은 내 가상의 자녀가 황제주라 불리는 직업군을 만난다면 마음과 상관없이 접었을 것 같아. 난 그만큼이 아니라는 열등감이지. 너무나 당연한, 사람 대 사람의 흐름이 부러웠어. 지인도 딸도 뭔가를 하는데 나만 흑백에서 컬러로 가지 못하고 오래 멈춰진 느낌이었지. 그런데 영화에서도 비슷한가 싶다가 결국 그들도 뭔가를 이루는 성공엔딩이잖아. 내 상황만 더 뚜렷하게 인지하는 상황이라 서러워서 울었네.

너 스스로 정확히 짚었잖아. 시기 아닌 자격지심이라고. 그건 남의 성취를 탐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에서 나오는 아픔이거든. 너라면 감정과 상관없이 접었을 것 같다는 말이 핵심이야. 자기규정이 이미 굳어 있다는 거잖아. 그들은 마음으로 움직이는데 너는 마음보다 나의 위치, 나의 색감을 먼저 확인해 버리니까.

너는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야. 계속 비교당하고 밀려나고, 기준 바깥에 놓이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이 그렇게 굳어진 거지. 그래서 더 슬픈 거고.

영화 얘기로 돌아가면… 네가 왜 그렇게 무너졌는지 너무 명확해. 영화는 그 시절의 고단함까진 같이 가주지만 그 이후에도 멈춰 있는 사람들까진 데려가지 않아. 엔딩에서 슬쩍 말해버리지. 그래도 결국은 다들 뭔가를 이루게 됩니다. 마치 이야기에 포함되지 못한 삶처럼. 그래서 울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나는 아직 흑백인데, 세상은 컬러를 기본값으로 여기는구나.” 이걸 너무 또렷하게 보여줬으니까.


혹시 시기심을 내가 포장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코스피 5천 돌파해서야 게으르게 앱을 깔고 비싸진 주식을 1개 사면서 남들은 다 돈을 벌고 나아지는 방향으로 진작 가고 있는데 난 무슨 배짱으로 살았을까. 한 번도 부동산이나 주식, 재테크에 관심은 없었지만 누구에게 도움받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알뜰하게 잘 살아왔고 그런 내가 자랑스러웠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었거든. 근데 그 소박하기 짝이 없는 바람을 비웃듯 현실은 급변한다는 거야.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것, 예를 들면 계란, 식용유가 어느 날 급등하더니 떨어지지 않지. 작년엔 쌀마저도 반 이상 올라 생존 필수품 마저 삶의 기본을 흔들어. 집값이 오르고 전세가 없어진 것도 힘든데 최소한의 장치마저 그 선이 붕괴되고, 일단 오르면 그게 하한선이야. 그런 상황은 가속화될 테고 가진 돈으로 욕심없이 알뜰하게 살겠다는 내 바람이 무용지물이 되는 게 당연하지. 믿어온 내 삶이 얼마나 어이없겠어. 이제라도 주식을 해야 되는구나 싶더라. 나만 다른 세상에서 잘못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여전히 흑백인가 싶은 자각에 절망스러웠지.


네 말에 흐름이 일관돼. 질투 → 비교 → 패배감이 아니라 신념 붕괴 → 세계관 붕괴 → 자기부정으로 가거든.

너는 게으르게 산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굉장히 성실하게, 다른 방식으로 산 사람이야.

번 만큼 쓰고 욕심 안 부리고 투기 안 하고 지금을 책임지며 살면 “최소한 삶의 바닥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게 네가 믿었던 규칙이었잖아. 그리고 그 규칙은 꽤 오랫동안 도덕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유효했어. 그래서 너는 당당했지. 그건 허세가 아니었어. 네가 틀린 게 아니라, 게임 룰이 바뀌었는데 공지가 없었던 거야.

계란, 식용유, 쌀… 그래서 주식 1주 산 장면이 더 아픈 거야. 돈을 벌겠다는 욕망보다 “나도 이제 여기에 들어와야만 하나”라는 늦은 입장. 코스피 5천 얘기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을 놓쳤다는 감각이잖아.

너는 소박해도 괜찮은 세상을 믿고 살았던 거야. 그 믿음이 무너질 때, 사람은 자신을 의심하게 돼. 근데 어이없는 건 네 삶이 아니라 기본 생계조차 투자의 대상이 된 구조야. 그 안에서 당당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게 잔인한 거지. 네가 느끼는 흑백은 뒤처짐의 색이 아니라 신뢰가 깨진 뒤의 색감이야. “열심히 살면 최소한은 지켜진다”는 약속이 깨졌을 때, 세상은 갑자기 무채색이 돼. 지금 네 절망은 “나만 못났다”가 아니라 “내가 믿었던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와.


어제 나에게 편지를 쓰면서 터졌던 부분이 나는 혼자 힘으로 견뎠다는 거야. 자립하고 독립적으로 살아온 건 내가 가진 힘이야. 과거엔 가장 큰 자랑이었지. 근데 지금은 약점 같아.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은 혼자 힘으로 되지 않았다는 거야. 인복이거나 재물운이거나 가족이거나 타이밍 같은 게 함께 작동하고 그걸 잘 활용한 사람이지. 내 오랜 성실과 검소함의 끝이 절망인 것은 나에겐 부스터가 없기도 했지만 혼자 힘으로 하려고 고집했다는 거. 다른 사람은 가족 중 최소 하나는 잘되거나 여럿이 잘되거나 한단 말이야. 내 주변도 다 그래. 저마다 굴곡은 있겠지. 하지만 좋은 시기가 한 번쯤은 있단 말이야. 근데 소박하게 사는 나와 가족은 아니야. 한탕주의나 욕심내는 사람이 없는데도 다 고단해. 내가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좋으니 가족이 잘 되길 오래 바랐는데 여전히 진흙에 있어. 그래서 더 서럽고 절망스러웠어.


정확히 짚었어. 요즘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능력 이전에 연결이야. 인복, 가족의 완충, 타이밍,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바닥. 그중 하나만 있어도 인생은 전혀 다른 궤도를 타. 근데 너는 아무것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럼 이렇게 말해야 공정해. 너는 부스터 없는 게임을 끝까지 혼자 플레이한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 느끼는 절망은 네가 못해서가 아니라 장치 없이 버틴 시간이 길어서 오는 거야.

가족 이야기는 정말 아프다.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는 말, 착실하면 먹고 산다는 말, 그 말이 어떤 이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현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사람은 세상을 믿을 수 없게 돼. 기도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서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야. 네가 혼자 견뎌온 힘은 쓸모없어진 게 아니라 세상이 그 힘을 보상하지 않는 구조일 뿐이야. 그리고 이 구조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야. 그 말은 타인을 해치지 않고 살아온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거든.


더 기대하거나 희망을 갖기엔 지쳐서 더 힘든 것 같아.


그건 자기 보호야. 너는 이미 너무 많이 실망해 봤잖아. 성실하면 지켜질 거라 믿었고 견디면 최소한 무너지진 않을 거라 믿었고 가족 중 누군가는 올라갈 거라, 적어도 같이 버틸 수는 있을 거라 믿었고. 그 믿음들이 하나씩 깨졌는데 그다음에도 또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자.”라고 말하는 건 잔인한 요구야. 그래서 “좋아질 거야.” 같은 말이 폭력처럼 들려.


절망스럽고 서러워서 울면서도 살고 싶다고 말한다. 나도 잘 살아보고 싶다고 말해. 말하는 내가 안쓰러운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 현실이 때로 버거워. 하지만 할 게 없으니 나를 안고 그냥 같이 우는 거야.


살고 싶은데 힘들어서 나오는 울음이잖아.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바람이니까. 스스로 그 말을 하는 네가 애틋해서 더 서러운 거야. 그 와중에 살고 싶다고 하잖아. 그건 아무나 못 해. 무너질 만큼 무너진 사람이 숨 쉬고 있는 시간이야. 말 안 해도 돼. 여기 있어.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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