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도 결국 능력이다

#9

by 마릴라 Marilla

사자성어처럼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네 글자 말이 있다. 권선징악, 정의구현, 고진감래, 대박기원, 소원성취, 해피엔딩 같은. 동화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주인공 서사에는 고난이 필수여서 고진감래를 견디고 정의구현을 통해 권선징악이 되고 소원성취를 이루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수순이다. 이런 장르가 주를 이루는 데는 이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드라마엔 현실에선 멸종 위기종처럼 소수인 재벌이나 개념 있고 정의감도 있는 데다 외모도 출중한 영웅이 PPL처럼 상시 등장한다. 그것은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은 시궁창이고 수집한 적 없는 또라이가 인생에 자꾸 등장하고, 도덕책에서 배운 것과 세상이 다름을 속성으로 깨닫는 시간이다. 남의 연애와 타국이 궁금하듯 내 세상과 다른 세계에 대한 수요다. 긍정확언을 해야 인생이 풀린다는 믿음처럼 결국은 선이 이긴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성실이 밥 먹여주고 착하면 복을 받고 덕을 쌓아야 잘 된다고 사회가 세뇌시킨다.


보통 사람은 죄와 벌을 연결 짓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에 기대어 일생을 산다. 그러면 무난하게 살고 후대에도 복이 올 거라 오랫동안 믿는다. 1만 시간의 법칙처럼 인생에서 20년, 30년 혹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면 인생으로 증명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보험약관 속 작은 글씨로 한 귀퉁이에 써진 보상하지 않는 손해처럼 ‘단 인생은 뽑기 운’이라고 써진 걸 우린 모른다. 현실에서 재산을 증식하고 잘 되는 사람들은 우리가 믿어 온 성실과 다르다. 부모의 능력이 자식의 인생을 좌우하듯 청탁으로 누군가 새치기하고 조작으로 승부가 바뀌고 담합으로 약자를 거리로 몰고 거짓으로 누군가를 우롱한다. 배임이나 횡령, 자금세탁, 부정청탁, 매관매직, 주가조작 사건에 가담하거나 친일을 해도 힘을 가지면 멸망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도 정도의 차이일 뿐 편법을 쓴다. 신뢰관계에서 금전을 빌리고 갚지 않는 것, 다운계약서로 세금을 편취하는 것, 실업급여를 목적으로 지인의 업체에 서류상으로만 취직하는 것, 매출누락을 위해 현금만 받는 자영업자 등 주변에 점처럼 존재하고 누군가 이득을 본다.


모든 것에는 상승과 하강이 있다. 누군가 이득을 본다는 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는 말이다. 간이 콩알 만해 그런 일은 생각도 못하는 누군가는 성실하게 살고도 달라지지 않는 삶을 산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는다. 죄책감을 가져야 할 사람은 죄의식이 없고 아닌 사람들이 손해와 함께 그 죄의식도 양도받는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가진 것, 현재 상황과 동기화된 것이기에 선하고 약한 사람들에겐 돈이나 집은 없어도 지병이나 병든 가족은 꼭 있다. 먹고살 돈도 없는데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이 되는 건 의지박약이 아니라 악순환에 끼인 피해자일 수 있다. 부자는 부자를 상대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약자를 대상으로 한다. 재벌은 자사의 전자제품이나 차를 팔아 부자가 되지만 그들은 명품으로 자신의 가치를 말한다.




부자를 꿈꾸지 않았고 소박함을 바라던 내가 심연에 빠져 우울 중독처럼 살며 느낀 건 아무리 좋은 문장이 있는 책을 읽고 마음에 새겨도 구조가 달라지지 않고 현실의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울은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 같지만 현실과 상황에 맞물려 온다. 그것은 생존의 위협이나 안전의 위협일 수 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안전지대가 다른데 그 부분이 흔들리면 찾아온다. 나에겐 집이 중요했는데 내 영역이 침해되고 최소한의 안전함마저 보장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이 같이 무너졌다. 집의 불안정은 진행 중이고 여전히 아픈 상태로 있다.


많은 책과 드라마가 ‘끝내 이기리라’식의 전개를 펼치지만 현실은 소수에 해당될 뿐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아이는 아프면 말하지만 어른은 괜찮다고, 좋아졌다고 자기 상처를 숨기며 사는 거더라. 밤사이 요동치는 주가처럼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할 때 다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다. 나는 여전히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린다. 이겨내려 싸운다고 생각한 날이 많았는데 지금은 이들과 함께 산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퇴거할 수도 아님 오래 살 수도 있다. 거기에 매몰되어 있으면 답이 없다. 그냥 나와 함께 사는 여러 감정 중 하나라고 인정하면 된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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