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어나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소포를 잘 받았다는 연락이 먼저 오길 바랬다.
결심만 하고 편지를 안 쓰고 기다렸지만 소식은 없었다.
서로에게 낯선 이국땅에서 그녀는 학교 카운슬러였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녀는 미국인이었고 나는 한국인이었다. 그녀에게 서툰 영어로 처음 내 얘기를 했던 날이 생각났다.
펑펑 울었던 그 날 이후, 그녀와의 상담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사무실로 향할 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겨서 설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새 출발을 축하한다며 그녀가 건넨 카드에는 100불이 있었다.
에콰도르를 떠나 미국으로 갈 때,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장 머무를 곳도 없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지인의 집에서 몇 개월간 머물며 학교 등록도 하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유학생활은 외롭고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가 데이지를 잠깐 돌봐줄 수 있냐고 했을 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2층 계단 입구에 있는 방에 들어가자 하늘색으로 칠해진 벽이 너무 맘에 들었다. 침대에는 하얀색 시트지가 깔려 있었고 수건과 세면도구도 있었다.
에콰도르와 뉴욕에서 보던 노을은 쓸쓸하고 우울했는데 그날 창문 밖으로 본 석양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커피를 참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1층으로 내려가면 커피포트에 그녀가 내린 커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1층은 항상 진한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테이블 위에는 그날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은 메모지가 항상 있었다. 필체는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녀는 뭔가를 항상 적어두었다.
그녀의 꿈은 해외 선교사였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 친구가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그 남자를 떠났다. 당시 알고 지내던 다른 남자 친구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고 현재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에콰도르에 도착했고 만났다. 카운슬링을 받으면서, 그녀는 한 번도 종교적인 "설교"를 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일상에서 내가 겪고 있던 감정을 다정한 친구처럼 담담히 잘 들어주었다.
사진 속에서 주름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오랜만에 봤을 때, 그녀의 메일에서 "노화의 부작용"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혹시라도 그녀가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나,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와의 첫 만남을,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었다.
언젠가는 희미해져 갈 내 기억도 믿으면 안 되었다. 이 공간에 기록하는 마음으로 적기 시작했다.
매일 글을 써 내려가면서 그녀에게 편지를 쓸 용기가 다시 생겼고 며칠 전, 드디어 답장을 할 수 있었다.
미국 우체국 사이트에는 배송이 완료되었다는 문구가 아직까지도 안 보인다.
몇 주가, 몇 개월이 더 걸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가 아닌 플로리다로 간 소포 덕분에 그녀와 다시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을 글로 써 내려가며 나의 근황을 알릴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글쓰기의 힘을, 그 위력을 다시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오래도록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