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고 있으신가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만다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가 보내 준 우체국 콜센터로 하루 종일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콜이 연결이 되긴 했지만 고객센터에 이메일을 보내라는 답만 받았고 메일을 보내 놓았다고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더 이상 전화를 하지 말라고도 부탁했다. 아만다를 귀찮게 한 것 같았다.
이곳에서 미국 우체국 홈페이지에 들어가 분실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페이지 자체가 넘어가지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이미 누군가와 바로 통화가 되었거나 해결이 되었을 것이다.
소포를 찾을 수 있을까?
미국에서 처리하는 것보다 한국으로 돌려보낸 소포를 다시 미국으로 보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검색창에 www.usps.com을 치고 계속 배송 번호를 조회했다. 2월 10일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면 한국으로 반환될 거라는 메시지만 계속 보였다.
연락을 해도 연락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지? 짜증이 올라왔지만 침착해야 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 이메일함을 열어보았다.
익숙하고도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그녀였다.
메일은 몇 시간 전에 도착 해 있었다.
편지에는 플로리다로 보낸 소포와 관련해서 펜실베이니아 우체국에서 처리 중이라는 메일을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소포를 못 받으면 플로리다에 있는 친구에게 픽업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5월 말까지 펜실베이니아에 있을 예정인데 데이지가 왜 플로리다 주소를 전달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주어 다행이었다.
메일의 맨 마지막에는 "잘"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고도 적혀 있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메일로 메꾸기 힘드니 언제 메신저나 화상통화를 하자 고도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녀의 메일에 바로 답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잘"지내고 있냐는 물음과 화상통화를 하자는 제안을 어떻게 하면 비켜갈 수 있을까?
최근에 살이 쪄서 볼이 통통해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뚜렷이 하고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직장인 블로거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블로거는 멀리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 온 이야기와 카페 인증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아침에 눈뜨면 커피와 함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으로 아침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동안 관심 있었던 미술과 경영에 대해서 알아가는 게 즐겁고 블로그에 열심히 기록도 하고 있다고 했다.
돈을 벌거나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과 "쓸모없는 즐거운 일"로 가득 찬 하루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때까지는 당분간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적혀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은 못 가지만 그래서 서울을 더 알아가고 있고 일주일에 2번은 부지런히 미술관을 다닌다고도 했다. 강제로 무엇을 해야 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하루라서 더 소중하다고 했다.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적혀있었지만 내 눈에 그 블로거는 그 누구보다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멋있어 보였다.
나 역시 도서관에서 콘텐츠, 마케팅, 기획, 주식 등 최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에 대한 책을 빌려와 읽는 중이었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도 내가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책만 읽을 때인가? 두려움이 올라와 책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도, 전시회, 음악회, 미술관을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내일만 걱정하고 있었다.
"잘" 지내냐는 질문에 그 블로거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 생각을 하다 한동안 읽지 않고 방바닥에 쌓여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류시화 님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닌가"가 읽고 싶어서 중간 어디쯤 페이지를 펼쳤다.
매장과 파종의 차이는 있다고 믿는다.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파종된 것이다.
청각과 후각을 키우고 저 밑바닥으로 뿌리를 내려 계절이 되었을 때 꽃을 피우고 삶에 열릴 수 있도록.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그녀에게 답장을 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