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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May 22. 2021

금요일 퇴근 전, 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오늘 저녁에 혹시 이 거래처랑 화상회의 가능해요?"


퇴근을 하려고 신발을 갈아 신고 있는데 팀장님이 갑자기 부르셨다.


"오늘이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오늘 약속 있어서 힘들어요?" 약속은 없었지만 약속 있는 척을 해야 했다.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상사가 그럼 혼자 콜을 하겠다고 했다.  


순간 멈칫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콜을 할 수 있다고 말을 해야 하나?








얼마 전 해외 거래처에서 주문이 왔다. 메일을 쓸 때 모두를 참조했고 내용이 다 공유되도록 했다. 팀장님에게 중간에 보고를 계속 드렸는데도 정신이 없으셨는지 이제야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셨다.


황당했다.


그동안 오고 갔던 메일을 다시 보여드리며 주문이 확정된 거라고 알려드렸다.


하지만 팀장님은 거래처와 정확하게 다시 확인을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았다.



"약속 있으면 지금 잠깐 콜 하면 어떨까요?"  하지만 해외 거래처는 시차 때문에 지금 새벽이었다.








다음 주에 거래처와 화상 미팅을 하기로 요청을 해놓은 상태라며 정중하게 말씀드렸다.  


"아 그래요?" 대답을 하시더니 하시면 갑자기 프로젝트와 관련된 질문들을 쏟아내셨다.


퇴근하려고 들고 있던 가방을 책상에 살포시 올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답을 해드렸다.


답을 하는 동안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의욕 있는 직장인처럼 보이려면 화상회의를 할 수 있다고 대답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않을까? 저분이 날 나쁘게 보면 어떡하지? 이대로 퇴근해버리면 월요일에 불상사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장 분초를 다툴 만큼 긴급히 확인해야 할 사항이 아니었다. 단지 본인이 미리 확인하지 못한 사항을 재확인하려는 차원에 콜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난감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보느라 온몸은 지친 상태였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팀장님의 질문에 대답 다 드린 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래요... 아이고 퇴근시간인데 물어봐서 미안하네"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주말 잘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드린 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약속도 없었고 몸도 피곤했지만 강변으로 향했다. 걸어서 퇴근하고 싶었다.








이직을 하면서 나 자신과 약속을 한 것이 있다.


마음속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넣는 것이다.


이 동그라미에는 회사가 없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글쓰기, 여행, 책 읽기 등 나를 설레게 하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들이다.


이 동그라미는 내 마음의 30%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루의 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에 업무와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한 영향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다 하되 예상치 못한 결과와 반응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실수를 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을 때 나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척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만의 동그라미를 떠올렸다.



나를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하는 그것들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쉽게 느꼈던 자괴감, 수치심 대신 동그라미를 떠 올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지치고 헤맬 때마다 동그라미를 떠올리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30% 지분이 너무 적은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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