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그리고 인류 공통의 판타지
세상에 시간을 소재로 한 영화가 참 많다고 문득 생각했다. 최근에 본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어바웃 타임>, <너의 이름은>,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모두 영화의 메세지가 '시간' 이라는 소재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시간을 주제로 한 영화는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세대와 인종을 불문하고 이토록 같은 소재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시간을 다루거나 시공간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인류가 꿈꾸는 공통의 판타지 혹은 환상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왜 갈망하는가. 아마 붙잡거나 되돌리고 싶어도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일테다. 시간은 곧 우리가 걸어온 아주 기나긴 길과 같다. 그 길 어딘가에서 우리는 분명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거나 혹은 그리워한다. 힘들었던 시간은 지우고 싶어하며 행복했던 시간은 끝자락이나마 잡아두려고 한다. 사실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상당한 것들이 시간의 불가역성이 없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부류일 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그토록 애틋해하는 것은 시간보다는 그 사이에 스며든 추억과 기억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잡아두고 싶어 그 순간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 열망이 사진을 발명해냈고, 이제는 목소리까지 담아내고 싶어 영상을 촬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시간에 대한 오랜 열망은 인간 예술 역사와 그 결을 함께 한다.
이에 대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화두를 던진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인생은 타이밍' 이라는 말이 곧잘 가볍게 쓰이지만 사실 이만큼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예컨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에게 호감을 가지는 게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 우리가 사랑해도 그 시간이 같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서로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도 인생의 한 순간에라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평생 모르고 살아갈 운명들이다. 그래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수히 엮여진 인연의 씨줄과 우연의 날줄은 때로 우리를 완전히 다른 드라마의 등장인물로 세워놓는다. 때로는 장난스럽고, 또 신의 엄숙한 뜻 같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렇게 촘촘히 묶여있는 존재들이다. 우연과 인연이 같은 연 자를 쓰는 것에 분명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완전 짱이라니까, 타임 리프! 매일매일이 너무 즐거워서 웃음이 멈추질 않아."
"마코토가 이득을 본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 <시간을 달리는 소녀> 中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생길 때마다 시간을 마구 되감아버린 마코토는 결국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자신을 좋아하던 치아키와 친구 유키가 사귀게 되는 것부터 자신 대신 조리 시간에 실수를 한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 친구 고스케의 사고까지. 마코토는 인연의 아주 작은 매듭을 바꿔지었을 뿐인데 그 순간 시간은 다른 곳을 향해 흐르며 그 결과는 너무도 크게 되돌아온다. 어쩌면 우리의 순간순간은 모두 저마다의 무게를 달고 있는지도 모른다. 찰나의 시간은 아주 작은 것처럼 보여도 그 모든 순간은 하나의 추를 달고 있고, 마코토가 시간을 되돌린 대가가 그 시간들의 무게합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 없던 일로 해 버렸구나. 치아키 너무 불쌍하다. 힘들게 고백했을 텐데."
...
"사귀지 그래? 어차피 아니다 싶으면 시간을 돌리면 되니까."
"그런 짓은 절대 안 해.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거잖아."
"그런 나쁜 일은 못하겠니? 잘 안되면 과거를 무를 생각으로 지금까지 신나게 놀았잖아."
- <시간을 달리는 소녀> 中
내게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고백했던 적이 있다. 그 후유증이 너무 커서 늘 생각했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절대로 고백하지 않을 거라고.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그런 용기는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그 때의 용기는 그 때 한 번 뿐이었다. 그래서 치아키의 고백이 힘들게 한 것이었을 거란 말이 공감갔다. 처음이라서 할 수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단 한 번이라서 할 수 있었다.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최선이었다. 시간이 다시 오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되돌리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최근 본 시간 영화 중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가 가장 좋았다. 그래도 타임리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성적인 납득이 갔다는 것이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는 사실 타임 리프 원리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봤고 <어바웃 타임> 은 기대를 많이 하고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잔잔했다. 그에 반해 이 작품은 마코토가 어떻게 시간을 달리게 되었는지가 전체 스토리와 잘 엮여 있어서 좋았고 영화의 여운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