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는 통제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고집 센 두 마리의 당나귀가 살고 있습니다.
욕구와 욕망이라는 이름을 가졌지요. 욕구라는 녀석은 우리 몸에 붙어서 기생합니다. 욕망이라는 녀석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데, 스스로 왕이라 자신하는 녀석이지요.
이 녀석들이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지요. 하지만 매번 사건과 문제가 터졌을 때는 이 두 녀석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 두 녀석이 또 무슨 바람을 일으켰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필경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의 배후에는 욕구와 욕망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요.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두 마리 고집 센 당나귀에게 빼앗겼을 때, 사건이 일어나곤 했으니까요.
안타깝지만,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교만해서 정신과 몸을 유혹하는 두 마리의 당나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거짓입니다. 잘못된 정보입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소풍을 즐기고 싶다면 교만한 마음을 믿지 마세요. 두 마리 당나귀는 생각보다 쉽게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요. 고삐를 쥐고 있는 쪽은 당신의 마음이 아니라 두 마리의 당나귀이니까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 니코데모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사람으로 유다교 최고 의회 기관인 산헤드린의 최고의회 의원이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 다르게 바리사이들 가운데에는 성실하고 충실한 이들도 많았는데요. 당시에 바리사이는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강조하였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백성들을 율법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고 모범을 보이는 데 힘썼습니다.
사두가이들이 정치권력을 통해 세상의 부귀를 추구하였다면, 바리사이들은 내세를 강조하고 부활을 믿으며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렸지요.
그들 가운데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스승님”으로 인정하며, 영생과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을 몰래 찾아왔습니다. “밤에(νυκτὸς)” 그가 찾아온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신중함이나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 상태를 짐작하게 합니다.
# 사마리아 여인
또 한 사람. 한낮에 야곱의 우물을 찾아온 여인도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요한 4,15.)
태양이 작열하는 중동 지역의 한낮은 물 길으러 가기에 좋은 때가 아닙니다. 하지만 일부러 사람이 없을 때를 골라 우물에 간 여인에게는 그녀만의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녀에겐 다섯이나 되는 남편이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실은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길을 몰라 헤매고 있었고, 그 목마름이 더할수록 여인의 방황은 더해졌고 악순환으로 여인의 갈증은 더 심해져갔겠지요.
다섯 남편을 만났지만, 여전히 한낮에 물을 길으러 나서야 하는 그녀의 고단한 삶이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그녀에게 1. 물을 청하는 예수님이 2. 생명의 물을 주실 분 3.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샘 4. 그리스도 5. 진실한 예배를 드릴 분 6. 하느님의 아들 7. 마침내 구원의 메시아심을 스스로 깨닫게 이끌어주십니다.
여인에게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인 생수 곧, 성령을 주실 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의 심연에 솟는 샘이 되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강’(요한 4,14; 7,38-39)이심을 깨닫도록 말이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이제 진실한 예배는 특정 장소에 매이지 않고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함을 계시하십니다. 메시아께서 오심을 아는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하시며 당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요한 4,21-26) 마침내 그녀는 물동이를 버리고 “와서 보십시오”(요한 4,29) 하며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생명의 샘이신 성령은 신자들 마음 안에 머물러 기도하고, 친교로 일치시키며, 진리 안에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평신도 사도직의 근원이 되는 생명의 물입니다.(교회 헌장 4)
# ἄνωθεν: 위, 새로, 거듭, 다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위로부터 태어나다’[겐네텐 아노텐,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be born from above)]라는 말은 아래를 상징하는 땅의 차원이 아닌 하늘의 차원을 뜻합니다.
육적인 차원의 인간의 몸이 아닌 영적인 차원을 일컫습니다. ‘거듭남’, '새로', '다시'의 근원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와 ‘아래’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두 가지 질서의 ‘존재 방식’을 말합니다.
반면에 ‘위’의 질서는 ‘거룩한 영’에 의한 다스림입니다. 이는 ‘영’적이며, 창조주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질서입니다. -참조: 차동엽, 홍승모-
그러므로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 말씀은 세례성사 때, 우리에게 임하시는 성령을 말씀하시는데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은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이자 ‘세례성사’와 ‘성령’을 상징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38-39) -참조: 백민관, 신약성서 해설-
# 물: 성령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생명을 바치셨고, 그 덕분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게 내 양식”(요한 4,34)이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전 생애가 온전히 성부께 봉헌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물’과 ‘성령’의 세례성사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위’에서, ‘영’에서 태어난 ‘자유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세례성사로 거듭난 신앙인은 이제 창조주의 ‘영’이자 예수의 ‘숨’- (ר֣וּחַ; Ruah 바람(wind), 숨(breath), 입김, 영(spirit), 생명(life) - 이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죽음에서 새로 태어난 부활의 생명입니다. 곧 하느님에게서 ‘거듭’ 난 ‘영’이자 ‘위’로부터 난 ‘생명’입니다. 새로 난, 영은 변화된 생명이자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분과 함께 일으켜지고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어 죄의 권세를 벗어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를. (참조: 골로 3,1. 2. 3-4; 로마 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