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는 이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인류를 ‘짝사랑한 한 남자’를 만납니다.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영혼을 죽기까지 사랑한 한 남자. 세상에, 이 넓은 땅에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으셨던’(마태 8,20) 한 남자를 임금이라 부르며 그의 삶을 기억합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이름난 정치인도 그의 꿈에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세상 걱정에 가슴 아파했던 사람이었고 진실한 사랑을 전해주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지요. 자신은 굶주리고 목말랐어도(마태 4, 2; 12,1; 요한 4,7) ‘모든 이들의 모든 것’이 되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온 누리의 임금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온 누리의 임금으로 오시는 그 남자가 원했던 것은 오직 사랑뿐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랑 말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마음속에 겨자씨만 한. 그 작은 사랑 하나 심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의 대가로 그는 세상과 인류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꿈에도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인간이 탐내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속된 무리들이 밤에도 그리워하는 권력과 이권이 난무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대사제나 위대한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나라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했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천국과 예수의 나라는 다를 수 있다?
그가 꿈꾸고, 그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 살고 싶었던 나라를 우리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천국과 내가 생각하는 천국이 같은 나라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망설이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천국, 아니 내가 꿈꾸는 천국이 예수가 전하고 예수가 살았던 나라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예수가 전한 나라, 하느님의 나라, 소위 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이 나의 생각과 내 욕망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조건 중에 공통된 하나는 누구나 위로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누구나 먼저 다가가 '조건 없이' 마음을 열지는 못합니다.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지요. 또 누구에게나 언덕이 필요하고 우산이 필요함을 알지요. 하지만 누구나 먼저 다가가 언덕이 필요한 이들에게 언덕이 되어주고 우산이 되어 주는 것도 아니지요.
사람들은 모두 그 남자처럼 ‘진실한 사랑’을 원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바랍니다. 어떤 이에게로 가서 어떤 무엇으로라도 남겨지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그 남자처럼 ‘짝사랑’ 중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기억 속에 남겨지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잊힌 존재가 되기보다 ‘타인’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기억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도 마찬가지겠지요. 누구나 가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늘나라, 곧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천국의 의미는 예수라는 이름과 불가분 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꿈꾸는 천국이 예수가 꿈꾸었고 세상에서 보여주었던 나라는 아니라 것이 역설이자 복음의 핵심이지요.
예수의 삶. 그가 지상에서 보여준 천국은 우리의 욕구와 달랐습니다. 그의 삶에서 물질적인 것과 이기적이고 사적인 힘과 권력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대신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했고, 그의 삶도 그들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즉 그의 나라는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사는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에게 그곳이 그의 삶이자 그의 전부였으며, 그곳이 그의 나라였습니다. 그에게는 그곳이 천국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말이지요.
예수(천국)의 역설과 부활
천국. 하느님의 나라. 우리는 그 나라를 예수의 삶에서 유추해내고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 나라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누구나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과 천국의 삶이 원하는 모두에게 열려 있고 또 그 삶에 아무나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한 가지 불행한 일은 여전히 하느님과 그의 나라(천국과 부활)가 악의를 가진 몇몇의 미성숙한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예수(천국과 부활의 다른 이름)를 잘 못 알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요.
예수(천국, 부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변론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지요.
1. 생과 사
2. 지옥
3. 대가
이런 말들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논지의 문제는 천국과 부활을 인간의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들과 사건으로 축소하고 일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카 21,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우리는 이미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아버지, 즉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활 논쟁 가운데 아버지의 속성, 즉 영원한 분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가 누구인지도 더불어 알게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이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빛)가 아버지(큰 빛)와 같은 분이시고 천국과 부활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이름 속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분의 이름 속에 천국이 있고 부활의 삶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천국과 그 나라의 삶을 죽음 이후의 삶으로 애써 환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천국, 부활)를 믿는다면 지금, 여기에서부터 아버지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를 온 누리의 임금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온 누리’라는 말은 이승(생의 삶)과 저승(죽음 뒤의 삶),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초월)는 이름이자 영원한 나라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삶이 그렇듯, 부활의 삶도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은 외형적인 생과사의 문제가 아닌 실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과 부활에 대해 질문할 때, ‘그곳이 어디에 있는가?’ ‘어떤 형태일까?’라는 질문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질문은 다음과 같지요.
‘지금 내 삶은 어떤 삶인가?’ ‘어떤 지향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삶과 내 삶은 얼마나 닮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말은 힘과 권력, 지위와 지식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문제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짝사랑했던 한 남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누구를 위해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마태 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