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 정화와 조명과 일치를 위한 기도의 시기
그분은 그들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이르셨다. 이에 그들은 같이 가서 그분이 머물러 계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지냈다.(요한 1, 39.)
사순시기, 은총의 시기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영혼의 정화와 조명과 일치를 청하고 기도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인간은 한계 상황과 마주할 때 비로소 피투 된, 파견된 자기와 마주하게 되지요. 실패와 좌절, 절망 앞에서 자신의 본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합니다.
한계상황에서 그는 우연과 필연의 갈림길에서 섭리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섭리의 길을 찾게 되고 섭리자를 만나러 가게 됩니다.
그는 이제 결코 만만치 않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안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요. 정화와 조명과 일치를 지향하는 기도가 그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울려옴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바오로 사도의 체험처럼, 자기와 이웃과 하느님께로 향했던 오해와 편견, 교만과 자만심, 탐욕과 부정적 욕망의 비늘, 그 두꺼운 껍질들이 하나씩 벗겨지고 제3의 인생, 부활의 삶으로 초대받은 기쁨을 나눌 수 있겠지요.
정화를 위한 불혹의 여정 사십
고대 근동에서 숫자 4는 사방(동서남북)을 가리키는 완전한 숫자였습니다. 숫자 10 또한 완전한 숫자로서 완전한 숫자 둘이 곱해진 40은 가장 완전한 의미로 쓰였지요. 더는 완전하고 완벽한 숫자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완전하고 완벽함을 뜻하는 숫자 40은 당연히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1.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뒤 하늘이 열려 밤낮으로 비가 내리며 땅을 씻어 냈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창세 7,12.17 참조), 산봉우리들이 드러난 뒤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려고 기다린 기간도 사십 일이었습니다.(창세 8,6 참조)
2. 40장으로 된 탈출기에서는 모세가 하느님과 계약을 맺으려고 산에서 머물렀던 기간이 사십 일이었고(탈출 24,18 참조),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한 것이 사십 년이었지요.(탈출 16,35; 민수 14,34 참조)
3.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천사가 주는 음식만으로 40일을 보냈으며(1 열왕 19,8),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을 벌을 상징해 사십일 동안 옆으로 누워 있었습니다.(에제 4,6)
4.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임금들인데요. 묘하게도 이 두 사람은 모두 40년간 다스렸습니다.(1 열왕 2,10) 요나 예언자가 니느웨가 사십일 만에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했던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사십이라는 숫자는 시련과 준비, 괴로움, 징벌을 통해 마침내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감초처럼 등장했습니다. 옛 것이 사라지고 새것이 등장하는 기간이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지요.
이렇게 보면 사십이라는 수는 정화의 시기, 기다림과 준비의 기간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변의 여건이나 상황들이 미혹에서 깨달음의 시기를 지나 흔들리지 않는 불혹으로 나아가는 기간. 한 사람의 의지나 인생관이 미혹에 그치지 않고 확립되는 시간이 40이라는 숫자의 의미와 상통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유혹은 소유욕에서 비롯되는데,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속에서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내면적 시련기였지요.
예수님의 유혹에 묵상할 수 있는 유혹의 과정은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되는데요.
첫째로 가장 동물적 본성을 자극하는 물질적 소유욕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가 인간적 본성을 자극하는 힘의 소유욕, 즉 명예와 권력과 연결된 욕망이지요.
세 번째로는 영성적 본성을 자극하는 신앙의 소유욕심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와 영생을 향한 집착과 애착으로 귀결되는 욕심입니다.
동물적 본성을 자극하는 시험 속에서 인간의 물질적 소유욕은 가장 본능적이고 자극적입니다.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 유혹은 감각이 만족을 느낄 때에도 사라지지 않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본능적 감각의 유혹을 초월하기 위해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불혹의 나이에 이르는 시간이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은 노예 살이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시련기였습니다. 즉, 영성적으로 불혹의 시간을 맞이하기 위한 영성적 필사의 사투 시기였지요.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는 그들의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소유욕을 충분히 묵상할 수 있지요.
광야에서 맞이한 40년의 시간은 육체적 불편함을 편안함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꼭 지나야 했던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방하착放下着
방하착(放下着)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는 것이다. 마음속 번뇌와 갈등, 원망, 집착, 욕심 등을 모두 벗어던져 버리라는 것이다.
나그네가 여행 중에 산세가 험준한 가파른 절벽 근처를 지날 때였다. 그때 절벽 아래서 “사람 살려” 하는 절박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절벽 밑을 내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실족을 했는지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떨어졌소?” 하는 나그네의 물음에 그가 애처롭게 대답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봉사올시다. 산 넘어 마을로 양식을 얻으러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는데, 다행히 이렇게 나뭇가지를 붙잡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있답니다. 어서 날 좀 살려주세요. 이제 힘이 다 빠져 곧 떨어져 죽을 것 같습니다.”
나그네가 아래를 살펴보니 그 장님이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는 땅바닥에서 겨우 어른 키 하나쯤 위에 있었을 따름이다.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위치였다. 그래서 나그네는 장님에게 외쳤다.
“지금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그냥 놓아 버리시오. 그러면 더 이상 힘 안 들이고 편안해질 수 있소.”
그러자 절벽 밑에서 눈먼 이가 애처롭게 부탁했다.
“내가 지금 이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면 천 길 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즉사할 것인데, 앞을 못 보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좀 살려주시구려.” 하고 통사정했다.
그러나 나그네는 봉사의 애원에도 “그 손을 놓아버리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갔다.
그럴게 얼마나 지났을까 힘이 다 빠진 장님이 손을 놓자 땅 밑으로 툭 떨어지며 가볍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다듬은 장님은 멋쩍어하며 가던 길을 급히 가버렸다.
“어떻게 떨어졌소?”
그 누구도 '어떻게 세상에 떨어졌는지' 답할 수는 없지요. 또 언제쯤 이 삶이 다할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매일매일 의미를 찾아 나서지 않으면 절망과 고통, 두려움뿐. 앞을 볼 수 없는 시각 장애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나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린다면 곧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아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있답니다. 어서 날 좀 살려주세요. 이제 힘이 다 빠져 곧 떨어져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安分知足’(안분지족)
시각 장애인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은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 내 안의 혈기와 열기가 식으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방하착 하면 ‘安分知足’(안분지족)이라는 말도 함께 떠오르지요.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알고 넘치는 욕심을 내지 않으며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하여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뜻인데요.
멈출 바를 알게 될 때, 멈추었을 때 자신의 처지를 살펴 알게 되고 분수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닌지. 처지와 분수를 알게 될 때 그제야 욕심과 욕망을 분별하게 되고 탐욕으로 빠지려는 마음을 붙잡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탐욕은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동차와 다르지 않아서 그 사람과 주변을 늘 불안하게 합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는 주변을 살피거나 바라보고 즐길 여유를 빼앗아 가버립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열기가 식고 혈기가 사그라지기 전까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이번 사순시기에는 방하착 하여 안분지족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스트 드라이버는 가야 할 목적지를 알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멈출 때와 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지요. 또한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