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 — 에데이 샤하르
지하 깊숙이 들어서자, 오래된 콘크리트 냄새와 곰팡이 습기가 제이드를 움츠러들게 했다. 낮은 천장에 매달린 전등 몇 개가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며, 빛과 그림자를 떨구고 있다. 파이프 여기저기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끝없이 똑똑 소리를 내며, 기묘하고 으스스한 리듬을 만들어 냈다.
그 아래, 낡은 상자들과 담요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쭈그려 앉은 늙은 여인은, 잔주름 가득한 얼굴에 무릎 위로 담요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 관절은 부서진 듯 굽어 있었지만, 묘한 온기가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허름한 작업복 상의를 입은 젊은 남자는 전자 기기를 만지작거리다, 제이드를 힐끗 쳐다본 뒤 다시 부품에 집중한다. 바닥엔 고철 부품과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불법 해킹용 칩이나 암시장용 AI 부품을 손보는 듯했다.
한쪽 구석엔 아이가 있었다. 열 살 남짓한 나이지만, 경계심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제이드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다. 말없이 몸을 웅크린 그 모습에서,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의 아픈 현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이드는 문득, 이곳 역시 자신을 내쫓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을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쌓여 있는 상자와 담요, 기계 부품들로 미뤄 보아, 이들 또한 삶이 얼마나 힘겹고 지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어느 젊은 남자가 노쇠한 금속 의자를 끌어와 제이드 곁에 놓았다.
“앉아요. 물… 아니, 일단 자리에라도 앉아서 쉬시죠.”
제이드는 잠시 머뭇거리다, 체념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제… 제이드(Jade)라고 해요.”
주변 사람들은 짧은 침묵 끝에,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방금 전 제이드를 이 지하로 안내해 준, 노쇠한 외투를 걸친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터라고 하오. 우린 전쟁 전엔 크리에이터들과 협력하던 사람들 중 일부였어요. AI를 전부 몰살시키기 전에,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죠.”
크리에이터라는 단어에, 제이드는 순간 흠칫했다. 전쟁 당시, AI를 직접 설계하던 천재 개발자들은 대부분 살해당했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도시를 파멸로 몰고 간 무장 로봇이 그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크리에이터의 기술을 아직도 재활용하며 지하에서 살아가는 걸까?
피터는 목소리를 낮추어 계속 설명했다.
“우리 모임 이름은 ‘에데이 샤하르(Edei Shachar)’, 즉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이란 뜻입니다.”
낮은 천장에 달린 전등 불빛이 그의 기계 보조장치에 부딪혀 반사되고 있었다. 금속판과 노출된 전선들을 보니, 아마 몸 일부를 기계로 대체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사연은 다르지만, 전부 하층부의 잔혹한 현실에서 도망쳐 내려온 이들일 가능성이 컸다.
“전쟁 이후, 세상은 AI를 증오하고, 레플리칸트를 기계 이하의 생명체로 몰아붙였죠. 하지만 우린 생각이 달랐어요. ‘언젠간 인간, 레플리칸트, 심지어 AI 로봇조차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하고 말입니다… 망상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겠지만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자, 제이드는 긴장 어린 눈길을 내리깔았다.
‘이런 말을 공공연히 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 텐데.’ 실제로 현 체제에서 AI나 복제인간 편을 드는 발언은 반역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층에서 생존하려면,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죠. 당신이 어떤 사정이 있는진 지금 묻지 않을 테니, 일단 좀 편히 계세요.”
제이드는 침을 삼키며, 그가 건네준 담요로 젖은 머리칼과 옷자락을 닦아냈다.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지만, 여전히 불안이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정말 이들이 호의적인 걸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그래도 의외로, 노쇠한 여인은 조심스레 제이드의 팔을 잡아 상태를 살피더니 미소 지었고, 작업복의 젊은 남자는 “경계할 필요 없다”는 듯 다시 기계 부품 조립에 몰두했다. 구석의 아이만이 여전히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인 눈으로 제이드를 살폈지만, 곧 그녀를 내쫓으려는 기색은 아니었다.
“여기가… 정말 안전한가요?”
제이드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피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언제 누군가에게 들켜서 단속팀이 내려올지 몰라요. 그래도 여기선 적어도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지키려 해요. 그게… 우리가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인 이유랍니다.”
“새벽”.
그 단어가 제이드의 마음 한구석에 묘하게 파문을 일으켰다. 하층부에선 대개 희망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질없다고들 한다.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디며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는 게 전부인데, 이들은 끝끝내 새벽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이드는 담요를 조심스레 걷어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이 무너진 도시에도 새벽이 오긴 올까….’
차가운 물방울이 합성 피부 아래까지 스며들어, 몸이 으스스 떨렸다. 하지만, 이 지하 공동체에서 우러나오는 온기만큼은 아직 그녀를 내쫓으려 들지 않았다. 마치 이들도 제이드처럼 어딘가 갈 곳 없이 내몰린 존재들이라, 누구 한 명을 함부로 밀쳐낼 여유가 없는 듯했다.
‘아마… 여기서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겠지.’
제이드는 자신을 달래듯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위로 끝없이 내리는 잿빛 비가 작은 창 틈으로 반사되어, 지하실을 희미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데이 샤하르”, “크리에이터”, 그리고 “AI와 인간의 공존” — 전쟁 이후, 이런 단어들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이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 사실 자체가 제이드에게는 낯설고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내려온 지하 안식처에서,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체력을 추슬러본다. 피곤과 두려움이 뒤엉킨 머릿속에서도, 혹시 이곳이 새로운 국면을 열 실마리가 되어 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떠오른다.
지상 위 노바 앤젤레스는 여전히 폭우가 계속되고, 현상금 사냥꾼들이 그녀를 찾아 골목을 뒤지고 있을 테지만 — 그럼에도, 이 지하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새벽’을 기다릴 이유가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