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50

5장: 늙은 천사(The Old Angel) 위의 잿빛 밤

by 진동길

술집 이름처럼, ‘늙은 천사(The Old Angel)’라는 옥상 간판은 옅은 붉은 네온 빛을 어둠 속에서 내뿜고 있었다. 언젠가 이곳이 신성한 수도원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무색할 정도로 밀거래, 불법 체포, 비밀 실험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비가 좀체 그치지 않는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 잿빛 하늘이 무겁게 드리운 가운데, 옥상 아래 지하 감방에서는 마리안이 밤새 제대로 잠 한숨 이루지 못했다.


허리를 죄는 족쇄가 쉼 없이 그녀를 조여 왔고,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좁은 감방을 울렸다. 이따금 들리는 낯선 목소리들과 비웃음 섞인 수군거림이, 그녀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마리안은 다리를 웅크린 채, 붉은빛의 사리 자락이 감긴 몸을 스스로 껴안았다. 인간에게 배신당해, 감옥으로 향하는 신세가 된 자신의 처지가 기막혔지만, 가슴 깊숙이 일어나는 공포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여긴… 완전히 끝장인 곳이잖아. 저 위에선 네온 빛 하나로 희망을 속삭이지만, 정작 여긴 지옥이야.’


그렇게 어둠과 비웃음에 휩싸여 있던 새벽 무렵, 잿빛 하늘이 어느덧 아침을 예고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여명은 늘 잿빛— 빛이 들어와도,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에선 그저 어렴풋이 희뿌연 구분일 뿐이다.


그러다 무거운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철문이 철컥 열리는 소리에, 마리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배스토니 교정시설에서 명령이 왔어. 이 레플리칸트를 즉시 넘겨라.”


거칠고 굴곡진 목소리가 공기 중에 퍼지자, 주점을 관리하던 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무장 교도관들이 빠른 걸음으로 마리안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별다른 감정 없이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마리안의 손목에 전자자물쇠를 채우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이제… 끝인가.’


커다란 쇠사슬에 이어 전자자물쇠와 재갈까지.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에, 마리안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절망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들은 온통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봤지만, 그들의 침묵 속에는 배스토니 교정시설이라는 이름이 던지는 섬뜩함이 은연중에 스며 있었다. 누구나 그 감옥을 ‘산 채로 타는 화형장’이라 부르고, 거기 들어간 이는 돌아온 예가 없다고 했다.




바닷가 여행의 추억

문득, 마리안의 눈동자에 결박당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떠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부서지기 직전, 그때마다 되살아나는 유일한 안식남편과 함께했던 바닷가 여행이었다.


아직 전쟁의 영향이 덜 미쳤던 그 시절, 바다는 물빛이 유난히 맑았다. 도시와 폭력이란 말을 잠시 잊으려는 듯, 남편은 모래사장 위에 작은 텐트를 치며 환하게 웃었다. 마리안은 살짝 붉은 사리 자락을 걷어 올리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는데, 햇살이 따스했고 파도 소리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우리, 전쟁 같은 건 몰라도 돼. 여기선 그냥 행복해지면 되는 거야.”


qkektrk cndjr.png


그가 모래 위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입 맞출 때, 마리안은 마치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구속도 음모도 없는 세상에서, 둘이서만 존재하는 파도 소리 —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완전해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제 아득한 환영처럼 멀어져 갔다. 남편이 음모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하고, 마리안조차 억울한 죄목을 뒤집어쓴 채 이 지하실에 묶여 있는 현실이 너무나 잔혹했다.


그날 밤,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에는 여전히 가 퍼붓고 있었다. 마리안을 태운 수송 트럭은 침침한 가로등과 어둠을 뚫고 배스토니로 달렸다.


창밖으로 번쩍이는 네온 불빛이 차창을 스칠 때마다, 마리안을 억압하는 사슬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고개를 떨군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결단이 교차하는 표정이 어른거렸다.


소장 프레이저(Frasier)가, 그녀의 감정 회로를 군사적 시선으로 해부해 병기로 만들 걸 상상하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지는 듯한 공포가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마리안은 스스로가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폭력에 내몰려도, 누군가를 갈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완전한 인간이 아니어도… 내 안에 ‘영혼’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는 있을지 몰라.”


그녀의 이 작은 믿음이, 곧 끝없는 어둠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희미한 불씨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배스토니 교정시설로 끌려가는 레플리칸트 마리안의 운명은 이제 소장 프레이저의 손안에 달려 있다.
전쟁 이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한 이 삭막한 세상에서, 마리안이 찾아낼 새벽은 과연 존재할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