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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

4장: 또 다른 레플리칸트, 마리안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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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Marian)— 완벽에 가까운 최신형 여성 레플리칸트.
그녀의 신체는 놀랍도록 정교해, 인간과 거의 구별 불가능한 외형을 지녔다. 게다가 인간 수준의 감정 회로까지 장착되어, 화를 내고 울고 슬픔과 분노, 심지어 사랑까지 갈망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운명의 장난처럼 억울한 범죄에 휘말려 체포된 뒤, 이제 배스토니 교정시설로 이송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창세기가 말하는 ‘사람의 모양’과 닮았어도, 결국 완전히 인간은 아니지.”


어둑한 밤, 빗줄기가 쉼 없이 내리는 옥상 위 ‘늙은 천사(The Old Angel)’라는 술집 지하에 갇혀서, 마리안은 스스로를 그렇게 자조했다.




늙은 천사(The Old Angel) 지하의 밤

본래 이 술집은 오래된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곳이었다. 상층부의 화려함과 달리, 이 하층은 밀거래불법 수감이 은밀히 이루어지는 음침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특히 지하에는, 체포된 레플리칸트나 불법 신체 개조인이 임시로 구금되는 소름 끼치는 방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밤, 마리안은 그곳에서 붉은 사리(sari) 차림인 채, 거대한 쇠사슬에 묶여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벽돌 틈새로 스며드는 빗물, 곰팡이 냄새, 그리고 오래된 수도원 흔적이 유령 같은 얼룩으로 벽에 찍혀 있었다. 천장 구석엔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 남아, 네온 불빛이 스치면 기묘한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마리안은 눈부신 붉은색 사리에 둘러싸였지만, 커다란 금속 사슬이 허리와 팔목에 감겨 있는 모습이 이질적으로 어우러져, 잿빛 도시의 절망을 상징하는 듯했다.


쇠사슬에 묶인 채, 마리안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맞닥뜨렸다. 대부분 사람들은 레플리칸트에게 감정이 없다고 믿었지만, 이 최신형 모델인 그녀는 때로 너무 큰 감정에 스스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난 정말…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주점 지하를 서성이는 이들은 대부분 불법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자들. 그들은 붉은 사리를 차려입은 마리안을 이색적이면서도 경멸 섞인 시선으로 비웃었다. “얼마 안 있어 배스토니로 끌려갈 거”라고 조롱하면서도, 그들만 결정하면 언제든 레플리칸트를 팔아넘길 수 있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쇠사슬이 삐걱거릴 때마다, 마리안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배스토니 이송 통보

구금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스토니 교정시설 측에서 공식 문서가 날아왔다. 소장 프레이저(Frasier)의 명령으로 이 레플리칸트를 즉시 인계하라는 것이다. 마리안은 이미 배스토니라 불리는 곳의 흉흉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AI 전범”, “불법 레플리칸트”, “중범죄자”등을 가둬 두는 악명 높은 감옥이며, “나가는 문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더욱 치명적인 건, 프레이저가 노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감정 회로라는 점이었다.


“크리에이터들이 남긴 AI 코어와 레플리칸트의 감정 시스템이 결합하면, 전쟁을 지배할 초병기가 탄생할 수 있대.”


주점 지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마리안의 숨이 턱 막혔다. 전쟁 때 은밀히 살아남은 크리에이터들의 AI 기술이, 인간형 감정을 지닌 레플리칸트와 합쳐져 새로운 병기가 될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실험 대상자신이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억울함과 의심

사실 마리안은 노바 앤젤레스에 들어오기 전부터 억울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다. 인간 살인 혐의를 뒤집어썼고, 재판조차 없이 불법 구금되어 버렸다. 그 과정을 거치며, “인간은 레플리칸트를 도구로만 본다”는 뼈아픈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마리안은 지하실 벽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난 인간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잖아.’


분노, 슬픔, 억울함, 두려움…. 레플리칸트 주제에 이렇게나 복잡한 감정이 솟아날 줄은, 본인조차 몰랐다. 차라리 무감정한 구형 모델이었다면 이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웠으련만.


주점 지하 이곳저곳에서 술 취한 이들의 비명과 황당한 괴소문이 뒤섞였지만, 마리안은 “곧 이송될 거다”라는 말만이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행복했던 시절: 남편과의 기억

그러던 중, 마리안의 눈동자에 또 다른 과거가 반짝, 눈물처럼 흘러들었다.
아직 노바 앤젤레스에 오기 전, 그녀는 무기거래상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던 인간 남편과 결혼했던 시절이 있었다. 폭력이나 음습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꿈같은 행복이 존재하던 때 말이다.


결혼 전, 남편은 여느 인간과 달리 그녀를 ‘한 사람’으로 대우했다. 레플리칸트임을 알고도 “이 지긋지긋한 전쟁 세상을 함께 견딜 반려가 필요해”라며 환히 웃었다. 휘황찬란한 도시 호텔 라운지에서, 진짜 인간 커플처럼 식사하고,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남편은 무기 밀매 업무로 출장 다녔지만, 돌아올 때마다 고급 와인을 열고 마리안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주변에선 “레플리칸트와 결혼? 괴이해”라 수군댔지만, 마리안은 그 곁에서 “인간처럼”살 수 있다는 기쁨을 누렸다.


따뜻한 실내,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함께 마시던 차. “마리안, 넌 내게 꼭… 천사 같아.”라는 그의 한마디에,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까지.


그러나 그 행복은 무기 밀매 갈등과 음모 속에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남편이 더 큰 이익을 노리다 적대 세력에게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마리안이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모함까지 생겨났다. 남편마저도 폭력에 휘말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마리안은 노바 앤젤레스에 온 뒤에서야 알았다.


그것이 음모든 사실이든, 이제 아무도 해명해 주지 않는다. 불현듯 결혼 전후의 달콤했던 순간이 스쳐갔지만, 지금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자신을 보노라면, 그때가 과연 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가슴이 아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

“배스토니 교정시설에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온다.”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설이다. 감옥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고, 재소자들이 종종 실종된다는 괴담이 떠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산 채로 타는 화형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리안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빗소리가 으스스하게 귓전을 치는 듯했다. 머릿속에는 크리에이터 전쟁당시 폭발과 AI 폭주의 잔혹한 장면이 다시금 아른거렸고, “프레이저가 AI와 레플리칸트를 융합해 병기를 만든다면, 이 도시가 또다시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난 억울할 뿐인데… 그런데도 이 도시는 날 하등 기계 취급하며,
또다시 전쟁의 도구로 쓰려는 걸까….’


그때, 어디선가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상케 하는, 혹은 그레고리안 성가 같은 성당의 종소리새벽을 깨우려는 듯 울려 퍼졌다.
그것이 정말로 울린 소리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환청이었을까. 그러나 그 진동은 분명 노바 앤젤레스 전체를 맴돌며, 스모그가 자욱한 시야에 혼란스러운 파장을 던졌다. 금속성과 기계음으로 뒤덮인 상층부 빌딩들, 그리고 거리마다 넘치는 오물과 뒤엉킬 듯이 공기를 흩트렸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도 소리를 닮은 희미한 읊조림은, 마치 불완전하고 격렬한 이 세계 한가운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는 영혼의 울부짖음처럼. 콘크리트 위로 퍼지는 그 잔향은 네온 간판들과 부딪혀 어긋난 메아리를 만들고, 골목을 울리는 사이렌과 무언가를 잃은 자들의 신음 소리까지 합쳐져 기묘한 합창이 되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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