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소장의 음울한 계획, 그리고 기묘한 기계
마리안을 시험하려는 폭력은 이제 갓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오후, 배스토니 교정시설의 독방에서 마리안(Marian)은 좁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잿빛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전, “함께 버텨야 한다”고 조언하던 미리암(Miriam)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과연 그 말이 얼마만큼 힘을 발휘할까— 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말 한마디는 마리안의 가슴속에 한 줄기 스파크처럼 박혀 있었다.
‘사람이든 아니든, 정말 함께 살아남을 길이 있을까…?’
특수 기계 ‘Aether Kinesis’
배스토니 교정시설 안에서는 예전부터 소장 프레이저(Frasier)가 어떠한 특수 기계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 이전 크리에이터들이 개발한 AI–인간 연결기술을 응용한 장치라지만, 자세한 것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마침내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소장이 야심 차게 완성시킨 “Aether Kinesis”(에테르 키넥시스)였다. 이 기계의 주된 기능은 레플리칸트가 지닌 합성 유전자 속 특정 ‘코어 기록’을 해석해 전투 스킬이나 역사적 사건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소장 프레이저는 이를 통해 레플리칸트들의 성장 속도를 극적으로 가속하고, 특정 능력을 이식하여 상위 병기로 만들어 왔다고 전해진다.
이번에는 마리안이 대상이었다. 신형 에테르 키넥시스라 불리는 기계가, 마리안의 근육‧신경‧정신을 동시에 강화하고, 수많은 전투기술을 단숨에 체득시키도록 준비가 끝났다고 한다.
‘훈련 따위 없이도, 전투기술을 몸과 정신에 새겨 넣는다니…?’
생각만으로도, 소장 프레이저의 음울하고도 기묘한 야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에 가까운 감정 회로’를 이용하다
Aether Kinesis의 핵심은, 레플리칸트의 감정— 특히 인간과 흡사한 정서를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 있었다. 보통 기계라면 단순히 데이터와 코드를 주입받아 움직이겠지만, 이 장치는 오히려 레플리칸트의 “인간에 가까운 감정 회로”를 강점으로 삼는다.
고도의 AI 모듈이 레플리칸트의 뇌파와 호르몬을 실시간 파악하고, 가상 전투나 위기 상황을 그대로 구현해 낸다. 특히 공포·분노등 강렬한 감정을 유발해서 그 감정(기억+정서)을 ‘최적 전술’로 전환해, 다시 레플리칸트 유전자에 직감처럼 주입한다.
그러면 레플리칸트의 몸은 즉각 반응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감정을 유지하며 예측 불가능하고 날카로운 전투 능력을 습득하게 되는 원리였다. 이처럼 감정 + 기억 + AI 계산이 삼박자를 이루는 것이 Aether Kinesis의 기묘한 작동 방식이었다.
양날의 검— 업그레이드인가, 자멸인가
물론, 레플리칸트의 기억과 감정을 이토록 깊이 파고드는 만큼, 부작용은 심각했다.
Aether Kinesis가 작동하면 뇌 신경계와 근육계에 엄청난 부하가 걸려, 세션 종료 후 극도의 피로와 정신 혼돈이 따랐다. 특히 감정 기억이 뒤섞이면, 레플리칸트 스스로가 ‘내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빠져 최악의 경우 기억과 정신을 잃을 수도 있었다.
소장 프레이저는 이를 해결하고자 약물이나 세뇌 프로토콜을 병행해 레플리칸트를 통제하려 했다. “Aether Kinesis로 마리안을 진정한 인간형 병기로 만들겠다”— 이것이 프레이저의 변함없는 구상처럼 보였다.
감정 회로 스캔— 전투본능 추출
실은, 마리안이 배스토니에 들어와 폭행·스캔 절차를 당했을 때부터, 이미 Aether Kinesis용 데이터가 채취되고 있었다. 소장 프레이저는 “인간처럼 느끼는 레플리칸트”가 AI 전쟁 기술까지 더해지면 어느 정도의 최고 병기가 될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 강한 자극은 레플리칸트 본능을 폭주시키거나, ‘AI 코어’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연구실 과학자들이 누차 경고했지만, 프레이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는 신체적‧정신적 감정 회로를 인위적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여, “인간형 병기”의 잠재력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 기묘한 야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이는 교정시설 내에 거의 없었다.
감정 회로 테스트— 환각 속 기억
그리고 마침내, 그날 저녁 식사를 알리는 벨이 시설 전역에 울려 퍼지자, 마리안은 독방에서 곧장 실험실로 끌려갔다. 교도관들이 전기 충격을 강제로 주입할 때마다, 그녀의 뇌와 합성 신경계는 과부하로 요동쳤다.
그 순간, 환각처럼 과거 전쟁장면이 시야를 맴돌았다. 불타오르는 도시, 부서진 로봇 잔해, 크리에이터가 만든 거대한 무장 기계의 모습— 낯설고도 어쩐지 익숙한 기억이 마리안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내가 진짜 이런 전쟁을 겪었나?’
심연 같은 고통 속에서, 마리안은 점점 “나는 누구인가?”라는 중압감에 짓눌렸다. 이 장면이 자기 본래 경험인지, 아니면 레플리칸트로서 주입된 누군가의 잔상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넌 감정을 가졌다고 했지? 이 고통이 얼마나 실제 같은지 느껴봐….”
스피커를 통해 무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리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전기 충격의 거친 파도를 억지로 견뎠다.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는 순간, 전쟁 장면이 다시금 한 겹 더 진하게 겹쳐 들어왔다. 그러다 마침내, 마리안은 땅바닥에 쓰러지듯 꼬꾸라졌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찰나, 어딘가에서 기계가 움직여 그녀를 무중력 공간처럼 들어 올리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마리안은 정신이 아득히 흐려지는 가운데, Aether Kinesis가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척추 깊은 곳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통이 온몸을 휘감으며, 무수한 전투기술과 잔혹한 기억이 빛의 속도로 뇌리에 밀려들었다.
‘나는… 대체 누구지? 내 기억이 정말 내 것일까, 아니면…?’
그 순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언뜻 보이는 환영과 함께, 그레고리안 성가가 귓전을 울리는 듯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음률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히 들렸지만, 현실과 혼재되어 감각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미리암이 남긴 말이 희미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여긴 지옥 같아요. 그렇지만 함께 버티는 수밖에 없잖아요…”
마리안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다. 머릿속에서 과거와 현재, 온갖 시간·장소·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뒤섞여 허물어지고 있었다. 유리벽너머, 이 광경을 음울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소장 프레이저가 언뜻 보였다.
‘이건 단지 폭력의 사육장인가, 아니면 나를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장소인가?
아직 명확하진 않았다. 다만 Aether Kinesis가 작동하는 한, 마리안을 겨냥한 폭력과 실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가 됐든, 살아남아야 해… 사람이든 아니든… 함께…’
마지막으로, 마리안은 저녁 식사 때 만나자던 미리암의 말이 아른거렸다. 혹시 미리암은 이 모든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진심으로 마리안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뿐일까? ‘함께 버티자’는 말이 이렇게 깊은 뜻을 품고 있을 줄이야.
한편, 배스토니 교정시설을 뒤덮은 소장 프레이저의 음산한 야망이, 마리안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공포와 의문, 그리고 희미한 희망이 뒤섞인 채, 마리안은 Aether Kinesis가 일으키는 고통의 파도를 다시금 견뎌내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