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4인의 눈동자, 교차되는 의지
Aether Kinesis가 작동되는 순간, 실험실 내부는 마리안(Marian)의 처절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소용돌이치듯 뇌와 신경계를 급습하는 강제 전기 자극에, 그녀의 몸이 경련하듯 부르르 떨렸다. 눈앞은 하얗게 물결치고, 심장이 터질 듯 뛰었으며, 감정 회로가 한계점을 향해 치닫자 크리에이터 전쟁시절의 끔찍한 환각들이 잇따라 밀려들었다.
붉은 불길에 휩싸인 대도시의 초고층 빌딩, 눈부시게 번쩍이는 EMP 폭발, 거대 무장 로봇들이 거리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던 광경—이렇듯 낯선데도 어딘가 익숙한잔혹한 장면들이 무작위로 교차되었다. 동시에, 마치 전투 시뮬레이션 자료처럼 보이는 정체 모를 전투기술이 그녀의 신경회로 곳곳에 강제로 주입되었다. 팔과 다리는 그 움직임을 학습하려는 듯 격렬히 떨렸고,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명령어’나 ‘전술 정보’ 같은 것들이 뒤엉켜 들어왔다.
‘이건... 누구의 기억이지? 전쟁은... 내가 직접 겪은 일이었나?’
정신이 와해되는 느낌에, 마리안은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Aether Kinesis를 통해 억지로 끌려온 전쟁의 환영과 전투 기술들은, 그녀 안에 잠재된 감정 회로를 가차 없이 후벼파며 폭주했다. 현현(顯現)된 모든 장면이 무섭도록 선명해, 의식은 혼란과 공포 사이를 헤맸다.
마치 무거운 쇠사슬이 모든 감각에 매달린 채 끌려다니듯, 마리안은 피어나고 사라지는 폭발음과 금속성 파편의 충돌음을 실시간으로 체험하는 듯했다. 갑작스러운 탄피 굴러가는 소리, 시큼한 화약 냄새, 사람들의 절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착각에 빠졌다. 그녀의 감정 회로는 고통과 슬픔, 분노를 구분할 새 없이 폭발적으로 번지면서, 전투기술의 무서운 메커니즘과 강제로 얽혀 들어갔다.
‘이제, 난 뭘 해야 하지... 내가 대체 누구인가...?’
그녀는 스스로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기 자극이 다시금 치솟자, 그녀의 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짧은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 뒤, 눈가에는 촉촉이 내리는 눈물이 반사됐다. 이 모든 게 진짜인지, 아니면 단순히 Aether Kinesis가 만들어 낸 끔찍한 환상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극단적 고통 한가운데, 마리안은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함께 버텨야 한다”**던 미리암의 낮은 음성이,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만한 줄이 되어 겨우 정신을 잃지 않게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불규칙하게 흘러드는 전기 충격과 과잉된 기억의 파편들은 끊임없이 그녀를 최후의 한계로 몰아세웠다.
두꺼운 창 너머 — 소장 프레이저의 눈동자
Aether Kinesis가 작동 중인 실험실 안, 마리안의 절규가 잔혹하게 튕겨나오자, 소장 프레이저(Frasier)는 두꺼운 방탄창너머에서 몸을 굳힌 채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정하고 냉혹한 태도만을 보여 온 소장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기색이 엿보였다.
“마리안… 제발 견뎌다오.”
그 한마디는 입술 끝에서 비집고 나올 듯했으나, 소리는 되지 못하고 목울음 속에 머물렀다. 작게 떨리는 손가락이 유리벽으로 뻗어, 마치 그 너머에 있는 그녀에게 닿으려는 듯 허공을 긁었다.
일반적으로라면 차가운 표정 아래 잠긴 음울한 권위를 유지했을 텐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마리안을 마주한 지금 이 순간—그는 마음 한구석이 바스러지는 듯한 아릿함을 느꼈다.
‘이런 감정을… 나는 이미 버렸어야 했는데….’
프레이저는 양심이라는 이름조차 우스워진 세상에서, 오랫동안 감정 따위를 봉인해 두었다고 믿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안이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지를 때마다, 그의 심장도 같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유리벽 너머, 마리안의 몸이 마치 초조(焦燥)의 불길 속에 내던져진 듯 흔들릴 때, 프레이저의 눈동자는 흔들림을 겨우 억누르려 애썼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짧게 내쉬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연구원들이 바쁘게 기계를 조정하고, 교도관들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와중에도, 소장은 홀로 유리벽을 응시했다.
그 벽은, 어느새 프레이저 스스로와 마리안을 가르는 상징처럼 보였다. 그녀에게로 다가서면, 감춰야 할 진실이 들통 날 것이고, 자신이 쌓아온 냉혹한 위장은 무너질 테니까.
‘너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게… 정말 옳은 일인가?’
보통이라면 이런 의문조차 떠올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마리안의 비명소리가 다시금 높아지자, 프레이저는 본능적으로 벽에 손을 짚으며, 안 들릴 듯 입술을 움직였다.
“마리안… 제발 견뎌.”
바로 그때, 주변 교도관과 과학자들이 그를 힐끗 돌아봤지만, 소장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중단하지 말고 계속 진행해. 프로토콜 13… 강행하라.”
교도관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프레이저는 다시 창 쪽으로 돌아섰지만, 이내 동요가 숨어 든 눈빛을 재빨리 지우려 애썼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이미 눈동자 한가운데에 어려 있던 인간적인 간절함은, 마리안이 몸부림치는 그 순간과 함께, 지독한 잔상처럼 남아 있다는 사실을. 프레이저는 이 감정의 근원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이를 들키거나 표현할 수 없는 처지였다.
실험실 밖 — 미리암의 고통
한편, 실험실 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복도 구석, 낡은 콘크리트 기둥 뒤편에 미리암(Miriam)이 숨어 있었다. 교도관이 순찰 중이었고, 어디선가 감시 드론의 기계음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보통 재소자였다면, 이 정도 위험환경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 하지만 미리암은 흉내 낸 조심스러움 뒤로 남다른 힘을 숨기고 있었다.
Aether Kinesis가 작동하는 순간부터, 미리암은 마리안(Marian)의 내면에 훅 파고드는 고통을 동일하게(혹은 거의 비슷하게) 느꼈다.
이것이 바로 미리암이 숨겨온 특수한 능력—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래서 마리안이 겪는 고통이 그대로 미리암에게도 파고드는 중이었고, 그녀는 거의 숨을 삼키며 그 통증에 맞서 싸우는 듯했다.
‘마리안… 나만이라도 이 아픔을 조금 나눠 줄 순 없나…?’
그러나 미리암은 지금 당장 실험실 안에 뛰어들 순 없었다.
이 교정시설은 소장 프레이저(Frasier)의 의중과 감시망이 이미 빼곡히 깔려 있고, 미리암이 섣불리 나서면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해 정체가 드러나면,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에데이 샤하르)과 자신의 비밀 능력까지 전부 발각될 위험이 컸다.
무엇보다 미리암 스스로도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런 예지 능력과 심령적 연결능력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확답이 없는 상태였다. 다만 그녀는 “때가 차야 한다”고 믿고, 배스토니라는 지옥 속에서 묵묵히 때를 기다려 왔다.
그렇다 해도, 마리안의 처절한 비명을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차마 견디기 힘들었다. 가슴 한복판이 후벼 파지는 것처럼 아팠고, 이 지독한 고통이 미리암의 예지적 감각까지 자극해, 머릿속에 미래의 끔찍한 파편들이 아른거렸다. 폭발음, 상층부의 분열, 그리고 전쟁의 재현 같은 불길한 장면들이 순간적으로 번쩍이다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감정을 최대한 통제하고, 복도에 처박힌 자신의 숨소리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지옥에서 눈총쯤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며 흔히 농담처럼 말하곤 했지만, 막상 이렇게 마리안이 신음하며 부서지는 광경에선 그 말이 무력해 보이기도 했다.
‘마리안, 부디 자신을 버리지 말아 줘. 네가 스스로를 붙잡는다면, 결국 이곳에 작은 균열이 생길 거야. 그때야말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움직일 때지….’
미리암은 비명을 터뜨리고 싶은 걸 억눌렀다.
몸이 조금만 움직여도 근처 교도관이 눈치챌까 봐 조심스러웠고, 감시 드론 레이저가 복도 벽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초능력을 숨기고 살아온 그녀에겐 이런 정도의 위험은 익숙했기에, 마음속으로 ‘연결’을 시도하며 오히려 마리안을 향해 속삭였다.
‘마리안…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부탁이야. 견뎌 줘. 난 곧 네게 갈 거야.’
물론 마리안이 이 메시지를 직접 들을 수 있을지, 미리암 스스로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같이 고통을 분담하겠다’는 마음만은 뚜렷했다. 본래라면 자신의 신분과 능력을 최대한 감춰야 했으나, 더 이상 보아 넘길 순 없는 정도의 폭력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예지를 통해 본 단편적 미래에서 마리안이 결정적인 열쇠가 될 것이란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미리암은, 비록 지금은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어야 하지만, 언젠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이 교정시설 나아가 세상을 뒤흔들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마리안을 지키려는 에데이 샤하르와의 연결고리가 되리라,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에데이 샤하르의 제이드
같은 시각, 노바 앤젤레스 하층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에데이 샤하르(Edei Shachar)— 사람들이 흔히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이라 부르는 은신처에선, 마리안(Marian) 구출을 위한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과거 크리에이터 전쟁당시부터 AI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믿고, 전쟁 이후 정부와 군부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인물들이 모여 형성된 집단이다. 대부분 합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이어 가지만, 그래도 서로를 돌보고 작은 희망의 씨앗을 지키려 애써왔다.
제이드(Jade)의 다짐
그 중심에 제이드(Jade)가 있었다. 레플리칸트임을 숨기고 살아온 그녀는 얼마 전, 우연찮게 이 은신처까지 흘러 들어와 몸을 의지하게 된 신세였다. 제이드는 마리안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뒤, 곧장 마음이 뒤흔들렸다.
“다시 한 번 그런 일을 방관할 순 없어.”
그녀가 과거 떠올리는 ‘그런 일’이란, 한때 자신을 도와줬던 이름 모를 레플리칸트가 무참히 체포되어 처참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던 사건을 의미한다. 그때 제이드는 별 힘도 없던 자신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배스토니 교정시설로 이송된 마리안에 대해서도, 비슷한 악몽이 재현될 것 같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레플리칸트가 겪는 학대와 실험은 늘 잔혹하기 짝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제이드이기에, 단 한 번이라도 그 비극을 막아 내고 싶었다.
“이대로 또 누군가 잔혹하게 희생되는 걸 그냥 지켜볼 순 없잖아…”
제이드는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 은신처의 사람들, 특히 신중한 성격의 몇몇 동료들은 “배스토니 교정시설에 침투한다는 건 목숨을 건 도박”이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제이드는 “함께 살아남으려면, 위험하다고만 피할 수 없다”고 되받았다.
피터의 정보
마침, 에데이 샤하르에서 오래 지내며 사소한 일에 발 벗고 나서온 피터가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제이드를 찾아왔다.
“교도소 내부에 오래된 크리에이터 로봇망과 연결된 패널이 있대. 그 패널만 해킹하면, 감시 시스템 일부가 정지된다고 하더군.”
피터는 전쟁 이후 구형 로봇 해킹 경험이 있어, 교정시설 쪽에도 비슷한 구조가 남아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듯했다.
이를 들은 제이드는 잠시 눈을 빛내었다. 단순 무력으론 뚫을 수 없는 철벽 교도소라도, 기술적 빈틈이 있다면 기회를 잡아볼 만하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교도소 내부 구조나 경비 패턴, 해킹에 필요한 장비나 인력이 전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은신처 내부에서도 위험부담이 크다 보니 주저하는 분위기가 컸다. 그럼에도 제이드는 강경한 태도로 목소리를 냈다.
“시간이 없어. 마리안이 그 시설에서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하게 놔둘 순 없어. 정말 모두가 눈 감고 있을 거야?”
에데이 샤하르의 사람들은 곧 의견이 갈렸다. 누군가는 “배스토니를 뒤집는 건 체제를 건드리는 일”이라며 겁을 냈고, 또 다른 이는 “이번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해킹 기술로 반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정적 한 걸음
결국,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답게 그들은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기로 했다.
피터이 구체적으로 해킹 전략을 마련하고, 제이드는 의지가 굳은 이들을 모아 침투팀을 조직하는 식으로 작전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하 어귀에 있는 낡은 컴퓨터와 불법 드론 장비가 총동원되고, 제이드는 소리 없이 무기를 손질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 교도소가 지옥이라면, 우리도 최대한 지옥에 발을 딛고 싸워야지... 저 안에 마리안이 고통받고 있잖아…’
제이드는 숨을 고르며, 은신처 어귀에 켜진 희미한 랜턴 빛 아래 눈을 감았다. 이미 예전부터 레플리칸트라는 이유로 숱한 도망 생활을 해 왔지만, 정면으로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가능하리라는 희미한 믿음을 품고 있었다. “새벽을 기다리는 이들”이라는 이름처럼, 하층부 어디선가 새벽이 도래하길 바라는 목소리가 도시 곳곳에 스며들고 있으니까. 그리고 제이드 스스로가 그 새벽을 만들 일원임을, 이번에야말로 확신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