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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줍는 아이

11장. 기억을 엮는 할머니

by 진동길


밤이 물러나고, 동틀 무렵이었다.
안개처럼 옅은 빛이 언덕 너머에서 번져오기 시작하자,
아이의 발끝에 고운 천 조각 하나가 살랑이며 흔들렸다.


그 조각을 따라가 보니,
가느다란 실들이 허공에 가득 뻗어 있는,
낯설고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졌다.
서로 교차하는 실들 사이에서,
나이 든 여인이 조용히 베틀을 돌리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본 할머니는
마치 오래도록 기다려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반갑구나.
네가 바로 별의 조각을 줍고,
잃었던 영혼의 소리를 찾아 헤매던 아이로구나.”


아이의 가슴속이 떨렸다.
그는 이곳에서도 ‘내 안의 노래’를 이어갈 수 있으리란 예감에
작은 등불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가슴속 기대가 피어올랐다.


“여기선… 뭘 짜고 계시는 거예요?”
아이의 음성에는 호기심과 설렘이 동시에 묻어났다.


베틀을 돌리던 할머니는 잠시 손을 멈추고,
아이의 등잔과 종잇조각이 뿜어내는 은은한 빛을 바라보았다.


“이건 기억의 천이란다.
사람들은 저마다 잊고 싶어 하거나,
혹은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라는 기억들을 품고 살아가지.
그 마음을 실처럼 뽑아내어 천을 짜면,

씨줄과 날줄이 서로 만나서
영혼의 소리를 되찾는 또 다른 길이 열리곤 해.”


낯선 듯 친숙한, 그러나 신비한 말에
아이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 순간, 아이가 쥐고 있던 종잇조각과 별빛 등불이
작은 바람에 일렁이듯 실처럼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마음에는
이내 수많은 기억이 선연히 떠올랐다.
밤새 걸어온 길에서 만났던 이들,
그리고 스스로도 잊고 지냈던 순간들…


마치 초가 달아오르듯,
아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감정의 실이 조금씩 풀려 나왔다.




기억을 짜는 손길

할머니가 빙긋 미소 지으며 손짓하자,
아이는 자연스럽게 베틀 옆에 앉았다.
들숨을 고르며 손끝으로 자신의 기억의 실을 더듬어보았다.


“이건… 아주 어릴 적 들었던 자장가 소리 같아요.”
“여긴… 그리웠지만 멀리 떠나보내야 했던,
이별의 장면 같은데요.”


아이의 음성은 약간 떨렸지만,
그 실들은 직조틀 위에서 하나씩 서로 이어지고 있었다.
고운 실이 교차할 때마다,
아이가 느꼈던 슬픔과 기쁨, 두려움과 설렘이
한 올 한 올 살아나 천 위에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눈빛에는 따뜻한 연민과 축복이 어렸다.


“그래, 모든 감정과 기억들이
결국 네 노래의 배경이 될 거야.
가끔 우리는 아픈 기억을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 또한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한 부분이란다.”




기억으로 짜는 영혼의 소리

아이의 손길은 점점 능숙해졌고,
심장의 고동에 맞춰 실들이 고요히 흔들렸다.
그러자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또 한 번 맑은 화음을 내었고,
아이의 작고 밝은 등불도 그 리듬에 맞춰 기꺼이 춤추었다.


“아… 이게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인가 봐요.”


한 가닥 한 가닥,
과거에 묻혀 있던 기억이
천의 무늬가 되어 나타났다.
자장가로 시작된 따스함,
이별로 인해 느꼈던 아픔,
그 사이를 채우던 수많은 감정들이
이제 하나의 천 위에서 어우러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이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잊지 마.
어떤 기억도 버릴 필요는 없어.
설사 아픈 것이어도,
그것은 네 노래와 네 별을 완성하는 실이 될 수 있으니까.




새벽을 여는 빛

어느새 먼 동이 트기 시작했고,
안갯속에 가라앉았던 새벽은
부드러운 햇살을 등에 업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와 할머니가 짜 놓은 기억의 천은
새벽빛에 반사되어 희미한 무지갯빛을 띠며 반짝였다.


아이의 마음엔 한층 투명한 용기가 생겨났다.
아직은 내 이름을 완전히 부를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기억들조차 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고맙습니다.
이 천을… 계속 짜도 될까요?”


할머니는 곱게 웃었다.
그 얼굴에는 수많은 세월과 이야기가 켜켜이 묻어났지만,
아이에 대한 믿음만큼은 깊고 선명했다.


“물론이지.
이 천은 멈추지 않는 너의 이야기야.
언젠가 진정한 영혼의 소리를 되찾았을 때,
네가 새로 짤 무늬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울 거야.”




다시 길 위로

아이는 한 폭의 천을 소중히 안고 일어섰다.
눈부신 아침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또다시 찬란히 흔들렸다.
그 진동은 마치 ‘함께 가자’며 응원하는 음색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곳을 떠난 뒤에도,
아이는 계속해서 기억의 실들을 이어갈 것이다.
좋은 기억이든 아픈 기억이든,
모두 하나로 엮여 나라는 존재의 밑그림을 그려나갈 테니까.


그렇게 별을 줍는 아이는,
새벽의 빛과 함께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언젠가 온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노래하는 날이 올 때까지,
이 기억의 천과 함께 세상을 걸어갈 것이다.


할머니는 천천히 회전하는 틀을 다시 돌리며,
아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 손놀림 사이사이,
안개 너머로 넘어가는 아이에게
작은 축복의 실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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